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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Nov 05. 2021

소우주의 보존 가능성

<얼라이드(Allied)> (로버트 저메키스, 2016)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서로를 탐색하던 남녀는 연극을 끝내려고 한다. 영원할 것만 같은 미래를 기약하는 두 사람. 하지만 <얼라이드>는 연인이 공유하는 전형적인 에피소드를 예상보다는 적게 나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부터다. 끝날 줄만 알았던 연극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징후가 포착되는 순간, 완전히 걷어낸 줄로만 알았던 베일이 몇 겹 더 남았다는 섬뜩한 사실에 직면한다. 마리안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흔적들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현실을 부정한다. 애초에 그에게 각인되어 있던 건, 감정을 연기하는 유능한 공작원의 스킬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과 온기다. 그래서 맥스는 끈질기게 확인해야만 한다. 맥스는 마리안에게 우리 관계는 진실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마리안은 그만큼 불투명한 인물이다. 단지 그녀가 첩보 공작에 능통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읊는 대사 한 마디 때문이다. 마리안의 말처럼 감정을 연기하는 일은 진실을 대체할 수 있을까. 서로 밀착한 채 숨소리를 속삭이고 입을 맞추다가도 슬며시 포옹하지만, 그 이면에는 끝내 지워낼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나도 상대를 속이고 상대도 나를 속이는 쌍방의 가면극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을 첩보와 공작 활동에 몸담아 왔던 두 사람에게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는 일은 일종의 숙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절머리 나는 장애물과 같다. 이들 세상엔 감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건 의구심과 냉혹함이다. 마리안과 결혼하려는 맥스를 향해 동료들은 임무로 맺어진 인연은 위험하다며 회의감을 표출하지 않는가. 맥스와 마리안이 서로의 감정을 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은 그래서 온전히 투명할 수 없다. 순도 높은 진실 혹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그런 불투명의 세상을 온전히 수용하는 일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따지려 드는 순간,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모두 검열과 판단의 대상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소우주의 생성


카사블랑카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오른다. 맥스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 맥스의 시점 숏, 그리고 이어지는 클로즈업의 매혹적인 조합. 일찍이 접선 장소로 향하는 동안 연락책은 맥스에게 그가 만날 사람에 관한 두 가지 정보를 건넸다. 자주색 그리고 벌새. 맥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서 있다. 하지만 이내 여인은 프레임을 벗어나 버린다. 재밌게도 이 여인에 가려져 있던 다른 사람이 맥스의 눈을 사로잡는다. 역시 자주색 옷이다.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뒤태. 그리고 이어지는 숏에는 옷에 수놓인 벌새 그림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시선을 위로 옮기면, 그의 눈길을 알아챈 여인이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곁눈질로 맥스와 눈을 맞춘다. 두 사람은 접선 장소에서 서로 만나야 하는 사람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 받았다. 맥스가 마리안을 확인한 뒤 미소를 살짝 머금으면 마리안도 따라서 미소를 지으면서 합의된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얼라이드>의 리듬을 재단하는 구간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이다. 아니 정확히는 마리안이 맥스의 시선을 감지한 순간부터 두 사람이 위장 결혼 연기에 돌입하기 바로 직전까지의 시간이 아닐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를 향한 미약한 믿음과 기대감을 드러내야만 한다. 평생을 위태롭게 부유하는 스파이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음미하는 존재들이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차 안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돌면서 두 사람을 응시한다. 이들의 시공간에 녹아들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호흡이 긴 롱테이크가 아닌, 짧은 숏이 계속해서 분절적으로 이어 붙은 형태로 구성된다. 마치 이들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감정을 나누고 있지만, 그들의 소우주에서 벗어난 외부의 시선이 개입되는 순간 이 불안정한 세계는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영화는 순순히 인정하는 셈이다. 그들의 관계 자체를 바라볼 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치 않으며, 우리는 그들의 시선과 몸짓을, 그리고 그들 사이의 무드나 기류 등을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는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이벤트가 발생하기 직전에만 감당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유예된 시간일까. 불현듯 팀 버튼의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이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맥스나 마리안과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는 건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3년의 어느 날. 한 어린이집이 독일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파괴된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페레그린 선생님은 자신의 특수 능력을 이용해 타임 루프를 만들어낸다. 폭격을 맞아 집이 파괴되기 직전까지의 시각으로부터 역으로 24시간을 되돌린다. <얼라이드>의 스파이들은 팀 버튼의 판타지 설정에 노출된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폭격 직전의 24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리안과 맥스가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적인 순간들 사이를 일종의 폭풍의 눈처럼 여기고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시공간, 즉 둘만의 소우주로 변모한다.


유능한 스파이들과 어린이집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우주를 감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페레그린과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실행하고, 폭격 시간이 가까워지면 뒷마당에 모두 모여 시간을 되돌린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하루를 얻는다. 페레그린이 시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하면, 아이들은 마치 신년 행사를 즐기듯 환호하면서 유예된 시간의 입구에 들어서는 일을 기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폭격을 앞둔 환호라니! 전쟁이 가져오는 죽음의 기운과 삶을 보존할 수 있는 소우주의 생성이 충돌한다. 이 감정적 파편의 얽힘으로 인해 생성되는 무드가 <얼라이드>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 듯하다. 물론 두 영화의 연결고리는 경력이 탄탄한 연출자(로버트 저메키스와 팀 버튼)가 같은 해에 내놓은 할리우드 영화라는 우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두 영화가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상마저도 공유한다는 사실이 맥스네 가족과 어린이집 사람들을 이어준다. <얼라이드>에서도 어린이집이 직면했던 순간과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포탄에 맞아 작동 불능 상태가 된 독일군 전투기가 스파이 부부의 집을 향해 추락한다. 다행히 비행기는 두 사람의 집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맥스와 마리안은 공포에 질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그 찰나를 버텨낸다. 비행기는 집과 충돌하지 않았고, 그들은 생존했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페레그린은 시간을 되돌렸다. 그래서 <얼라이드>에서 중요한 건 카메라가 짧은 시간 동안 온갖 감정들이 스쳐 가는 가족의 얼굴을 분명하게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생성되는 소우주, 그 유예된 시공간이 뿜어내는 인상이 <얼라이드>를 매혹적인 텍스트로 만든다.




의심과 균열: 경유하는 이미지들


격추된 비행기가 두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던 상황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균열의 징조가 감지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조그마한 불신이 개입되는 순간, 끈끈했던 관계는 급격하게 동력을 잃는다. 결국, 그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호함을 안은 채 서로의 흐릿한 형상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얼라이드>는 묘한 영화다. 한편에는 감정선을 따라 들끓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박자를 타는 멜로의 텐션이, 다른 한편에는 진실과 거짓을 오가면서 상대를 교란하거나 교란당하는 난감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얼라이드>의 무드를 재단하는 건 불투명한 이미지들이다. 명징한 존재감을 피력하는 이미지가 아닌, 그 자체로 의뭉스럽고 부정확한 지점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 이미지들 말이다. 매개물과 경유지를 거친 뒤 도달하는 불투명한 형상들이 영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맥스의 미소가 슬쩍 번지는 장면.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의 관록과 그가 연기하는 맥스에 들러붙은 캐릭터의 매력이 섞여 생긴 묘한 물성이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된다. 배우로 인해 맥스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건지, 맥스로 인해 브래드 피트의 이미지가 재감각되는 건지 헷갈리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이건 마리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정체를 숨긴 자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아는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다. 영화 속 맥스와 마리안은 그만큼 투명하게 감각될 수 없는 의뭉스러운 인물이 된다. 모호한 속성의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엷은 미소는 작전의 출발점이다. 이 미소엔 실수 없이 부부 연기를 무사히 완수하자는 공동의 의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또렷할 수 없는 <얼라이드>에선, 이 미소마저도 몇 겹의 베일로 섬세하게 둘러싸인 듯 적당히 흐릿한 감정을 형상화한다. 두 사람의 미소에 무엇이 배어 나올까. 매력 있는 상대를 봤을 때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호감일 수도 있고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었다는 스파이의 육감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사실. 믿든 안 믿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만나야만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된 것. 두 스파이를 파고드는 이 운명론적인 무드가 불확실한 기운을 견뎌낸 채 보존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모호한 요소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채 서로를 응시한다. 이때 잘 보존되던 소우주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기는 원인은 모두 인식의 오류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맥락에서 <얼라이드>의 몇몇 구간들을 유심히 살필 때, 거울에 비친 형상과 반사된 이미지들이 자연스레 포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리안은 맥스에게 사람들을 어떻게 속여야 하는지, 어떤 착장과 말투로 파리지앵 다운 특성을 각인시켜야 하는지 상세히 일러준다. 이때 옷장 문짝에 달린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에 맥스와 마리안의 형상이 편입된다. 문득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임무를 위해 맥스에게 필요한 정보를 건네주는 마리안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맥스가 함께 담긴 투 숏, 그리고 맥스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에서는 화장대 거울에 말을 이어가는 마리안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담기는 구간들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마리안이 맥스의 목에 목걸이를 채워주는 장면만큼은 자질구레한 대사가 없다. 여기엔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 그리고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는 호흡과 시선을 잠시 교환하면서 생기는 묘한 긴장감만이 있다. 위장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거울 이미지들 틈으로 진솔한 감정의 텐션이 지배하는 물리적 감각 교환이 은근슬쩍 끼어든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맥스는 마리안이 뒤돌아 탈의하는 모습을 옷장 문짝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다. 이때 맥스의 질문은 사실 후반부에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해 두 사람의 소우주를 뒤흔드는 어떤 흐름과 맞닿아 있다. 마리안은 흘긋 뒤를 응시하고 그 모습은 거울을 통해 맥스에게 가닿는다. 정체를 숨긴 마리안은 어쩌면 경유하거나 매개되는 이미지를 통해 처음부터 주장하는 것 같다. 맥스는 과연 마리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던 걸까? 애초에 거울을 거쳐서 불완전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던 건 아닐까. 과연 맥스에게 진실은 남아 있는 걸까. 의심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게 된다. 맥스는 그래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통해 마리안을 바라보려고 한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 확신과 의심이 뒤엉킨 복잡한 속내는 바로 거울을 거쳐서 도달하는 시선의 불완전한 몸부림으로부터 잘 드러난다. 나도 상대를 온전히 응시할 수 없고, 상대도 나를 온전히 응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두껍게 쌓인 베일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남은 건 다소 극단적인 방식이다. 소우주를 유지하거나 파괴하거나. 타협이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맥스든 마리안이든 두 사람에게 어쩌면 이건 필연적인 결말일 수밖에 없다.




소우주의 파괴


비행기 추락 이후, 맥스는 끝내 비극적인 운명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진실을 파헤치는 그가 마주한 건 그들의 소우주가 더는 존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격추되는 비행기로부터 살아남은 순간이 진작에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던 건 아닐까.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맥스는 경고를 받고도 소우주를 보존하려는 욕망 대신 깨부수려는 본능에 몸을 맡긴다. <얼라이드>는 맥스와 마리안의 세계에 관한 영화다. 그들의 소우주가 생성되고 보존되는 듯하다가도 끝내 균열을 수습할 수 없어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얼라이드>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요소는 그 어떤 장르 요소도 아닌, 바로 두 사람의 시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그들의 소우주는 필사적으로 지켜내야만 하는 의지로 지탱되지 않는다. 그저 운명의 흐름, 우연의 개입이 느슨해진 필연의 논리. 이 정해진 경로에서 인물들은 부유하고 진동하고 오인하고 방황한다. 그러다가 베일이 마침내 걷히는 순간, 두 사람은 각자 운명을 수용한다. <얼라이드>의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온전히 곱씹은 뒤 관객과 작별을 고한다. 맥스의 이야기는 다시 의뭉스러운 베일 속으로 매몰된 채 딸에게 구전될 것이다. 그리고 마리안의 이야기는 내레이션과 함께 서서히 옅어져 갈 수밖에 없다. 끝내 관객을 파고드는 건 흑백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마저도 역시 진실과 거짓의 판별이 불가능해진 어떤 소우주의 보존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맥스와 마리안만이 그 사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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