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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Sep 01. 2021

낭만을 머금은 공간들

<퐁네프의 연인들>과 <헤븐 노우즈 왓>

얼마 전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1991)을 감상한 뒤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의 원천은 뉴욕 길거리 한구석에 있었다. 사프디 형제(이하 ‘사프디’)의 <헤븐 노우즈 왓(Heaven Knows What)>(2014)에서 뉴욕의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가도 죽일 듯이 달려든다. 작년에 영상자료원 기획전을 통해 보았던 이 영화는 <퐁네프의 연인들>과 굉장히 닮아 보였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정정하겠다. <헤븐 노우즈 왓>이 <퐁네프의 연인들>을 참고했을 거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아무래도 사프디가 <헤븐 노우즈 왓>을 기획하면서 <퐁네프의 연인들>을 레퍼런스로 삼았던 듯하다. 내게 두 영화는 정말 비슷해 보였다. 어떤 점들이 두 편의 영화를 연결하고 있을까. 대책 없이 방랑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낸 서사 때문일까.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 비슷해 보였을까?


'헤븐 노우즈 왓' 스틸컷 © RADiUS-TWC



실재와 허구의 혼재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두 부랑자의 로맨스가 스며드는 공간은 퐁네프(Pont Neuf)이다. 이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된 ‘연인의 다리’ 퐁네프는 프랑스 파리의 센(Seine) 강에 위치한다. 영화 속엔 퐁네프의 모습이 굉장히 자주 나온다. 재밌게도 주로 등장하는 퐁네프는 사실 프랑스 남부에 건설된 세트다. 레오스 카락스는 파리로부터 퐁네프 촬영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촬영은 세트장에서 진행했다. 그렇다면 퐁네프의 낭만은 실재하는가? 전문 배우들은 노숙자를 연기하고, 세트장은 진짜 퐁네프처럼 관객을 속인다. 관객에게 가닿는 영화의 활기는 허구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가상의 세트에서 비롯된 인위적 무드를 지워내는 퐁네프의 낭만적인 물성이 인상 깊다. 이런 독특한 공간에서 인물들은 어떻게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주인공 알렉스에게 반영된 카락스의 애착이 느껴졌다. 카락스의 본명이 알렉스 뒤퐁이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알렉스를 연기한 드니 라방은 카락스의 페르소나가 아닌가. 극 중 알렉스의 춤에는 무용에 익숙했던 라방 본인의 노하우가 배어 있는 듯 보인다. 즉, 이 영화의 알렉스는 여러모로 가상의 시나리오에만 머무르는 것 같지 않다. 가상과 실제가 혼합된 퐁네프를 배회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낭만을 좇는다. 각자의 소우주를 머금은 채, 순간을 감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카락스 특유의 영상미는 이런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알렉스의 순수함은 곧 그의 몸짓을 통해서 구체화되기도 한다. 그는 말보다 몸이 앞서는 인물이다. 도입부에서 알렉스는 아스팔트 바닥에 이마를 문대는 방식으로 뒤틀린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는가.


한편 <헤븐 노우즈 왓> 기획 당시 사프디는 길거리 캐스팅 도중 아리엘 홈즈를 만났는데, 홈즈는 마약에 중독된 채 방랑하던 노숙자 생활을 겪은 적이 있었다. 사프디는 그녀의 삶을 재구성한 <헤븐 노우즈 왓>을 연출했고, 홈즈는 이 영화에서 본인의 실제 경험을 살려 연기했다. 이 영화에는 다수의 비전문 배우들과 실제 부랑하던 삶을 살았던 경험을 가진 이들이 출연한다. 이런 현실 질료가 묻어나는 인물들이 뉴욕 길거리를 배회한다. 사프디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 피사체의 사실적인 질감을 담아내기 위해 망원 렌즈로 클로즈업하는 촬영 방식을 선택했다. 사프디의 영화에서 시나리오상의 인물들은 현실과 맞닿아 있고, 그들이 몸담은 장소들은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온전한 현실도 아니고 온전한 허구도 아닌 모호한 공간들. 어쩌면 카락스와 사프디의 영화적 공간은 인물들을 내러티브에 묶여 있지 않게 하기 위한 장소처럼 보인다. 그렇게 뿜어내는 날 것의 질감들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컷  © 오드



사프디의 뉴욕


<헤븐 노우즈 왓>에서 사프디는 화려한 뉴욕을 담아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뉴욕은 세련된 낭만이 절절하게 묻어 나오는 우디 앨런식 뉴욕이 아니다. 인물들은 잔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선 불가해한 장애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사프디는 대개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관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나 존 카사베츠의 인장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븐 노우즈 왓>에서 할리는 일리야와 재회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뉴욕 라이프를 이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사프디의 뉴욕은 냉혹함과 잔혹함만이 있는 공간이 아니다. <헤븐 노우즈 왓>에서 할리와 일리야는 서로의 육체를 맞대며 감정을 나눈다. 매일 방세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궁핍한 노숙 인생이지만, 사프디는 이들의 삶에 기승전결의 서사를 부여하는 대신, 사소한 찰나를 긍정하는 화법으로 이들의 삶을 어루만진다. 일리야가 던지는 휴대폰이 폭죽으로 바뀌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사프디는 비참하고 씁쓸한 삶의 여정 가운데 잠시나마 감각할 수 있는 아주 잠깐의 낭만을 인물에게 부여한다. 불꽃놀이의 모티브도 카락스의 영화를 통해 얻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프디의 영화는 늘 그런 식이다. 함께할 때 피어나는 낭만을 아주 잠깐이라도 머금으려고 한다. 사프디의 세계는 결과로 표상되는 것이 아닌, 과정의 연속이다. <언컷 젬스>(2019)의 하워드는 거액을 베팅한 자신의 선택이 맞아들어가는 순간을 매번 광기에 사로잡혀 음미하고 있지 않은가. 그 역시 순간만을 살아가는 사프디식 인물이다.


'헤븐 노우즈 왓' 스틸컷  © RADiUS-TWC



카락스의 파리


카락스의 파리도 사프디의 뉴욕처럼 처절한 현실의 질감과 생생한 낭만이 공존하는 세계처럼 보인다. 카락스의 장편 영화를 다 챙겨 보지 못한 탓에, <퐁네프의 연인들> 속 파리를 중심으로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정확히는 파리 대신 퐁네프라는 국소 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좋으려나? 어찌 됐든 카락스의 퐁네프는 그만의 미적 감각을 통해서 매력을 뿜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보수 공사로 인해 통행이 금지된 퐁네프는 그 자체로 세상과 분리된다. 이 다리에서의 모든 경험은 한낱 환상이었을까. 펑펑 터지는 폭죽 아래 두 사람이 함께 춤추던 때도, 함께 술을 마시며 잠들던 때도 모두 꿈만 같은 일들이다. 퐁네프를 벗어나면 냉혹한 현실이 기다린다. 다리를 벗어난 알렉스는 방화범이 되어 감옥에 간다.


그렇다면 사랑과 시력을 잃은 미셸은 퐁네프의 노숙 생활로부터 안식을 얻고자 했을까. 사실 미셸은 퐁네프에 안착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며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알렉스를 저버리는 미셸은 여전히 다리 바깥의 삶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알렉스의 세상은 퐁네프가 전부지만, 미셸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잠시나마 각자의 이유로 고독과 소외를 공유하고 사랑에 빠졌지만, 영원한 낭만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알렉스는 미셸을 데리고 물로 뛰어든다. 어쩌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직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퐁네프든 길거리든 물속이든 배 위든 그들이 함께하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그렇게 카락스의 연인들은 서로의 시선과 감정과 언어를 교환하는 데 집중한다. 두 사람은 모래 운반선을 모는 부부에게 끝까지 함께 가자고 말하지만, 영화는 종착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배 위에서 움직이는 순간을 담는 트래킹 숏은 그 자체로 함께하는 시간을 긍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락스의 파리와 사프디의 뉴욕에서는 모두 낭만을 좇는 인물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 스틸컷  © 오드



http://www.cine-rewind.com/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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