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석이 그가 연기하는 주요 배역들을 제도권의 질서와 규율이 견고하게 자리한 세계 속에만 머무르게 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이건 억측이 전혀 아니다. 만약 그가 기획하는 작품이라면 제작 단계부터 본인의 의도와 호응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테고, 그런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라고 해도 들어온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 연기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이 될 때 작업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다시 말해 마동석이 선택한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인 경찰(<범죄도시>)은 특정 기준과 상황 속에서만 폭력을 활용할 수 있지,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휘두를 수는 없으며, 깡패(<나쁜 녀석들> 등) 역시 폭력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영영 사회와 격리되기 때문에 상황을 가려가면서 판단해야 한다. 결국 마동석은 여러 제약조건에 둘러싸인다. 어쩌면 타고난 육체의 힘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마동석은 모든 이해관계와 논리를 무시하는 무법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가 연기하는 배역의 폭력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그 폭력이 이끌어내는 유무형의 변화가 사회적 합의하에 납득 가능한 수준의 결과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를 거듭하는 범죄도시에서 마석도가 내뱉는 대사 “나쁜 놈들은 잡아야 돼”는 비단 해당 시리즈 내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배역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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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전>의 장동수는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는 ‘나쁜 놈’이지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가. 역시 대사 한 마디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저런 새끼는 살려두면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마동석의 필모그래피를 지배하는 논리가 있다면, 그건 ‘정당화된 폭력’이다. 하지만 이건 폭력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눈감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한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인을 처단해야 하기에(<범죄도시> 시리즈, <악인전> 등) 폭력이 응징의 수단으로서 용인될 수 있으며,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성난 황소>, <신과 함께-인과 연> 등)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명분이 생겨나는 셈이다.
이때 그의 폭력을 눈감아주는 관객들이 스스로가 불편한 마음을 정화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다는 점을 기억하자. 폭력이 도구인 점은 알겠는데,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 대해 윤리적인 민감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나. 바로 여기서 마동석의 ‘빈틈’은 관객의 니즈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마동석의 허술한 면모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하고 귀여운 언행들 말이다. 이 빈틈들은 단순한 요깃거리가 아니라, 그를 재정의하는 성격 요소로 작용한다. ‘거칠게 남을 때려눕혀도 사실 저 사람은 여리고 따스한 속내를 가진 것 같다’는 식으로 인식의 조정이 일어난다. 결국 관객들이 마동석의 출연작 속 캐릭터들을 대할 때, 인물 각각에 가까워지는 대신 오히려 언행의 주체인 마동석이라는 존재와 소통할 기회만 늘어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