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7.17-2020.07.23
<반도> (연상호, 2020)
이 영화에는 삶의 터전을 잃고 부랑하는 반도민의 애환도 있고, 황폐화된 반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욕도 느껴지며,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희망도 포착할 수 있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다소 산만해 보인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보편적 감정의 분출과 결합을 추구한다. 초반부 관객의 내면을 건드리는 감정적 순간의 배치는 너무나도 당당하다. 어쩌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납득 가능한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한 감정선 몰입을 추구하면 안 될 것 같다. 그저 각각의 인물들로 대표되는 인간 군상의 보편성에 공감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도>를 향한 평론가와 관객의 평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이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조심스러운 절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기대에는 못 미치는 작품이었지만 이 평가는 호불호의 영역일 뿐이다.
카체이싱 시퀀스를 내내 지배하던 불완전한 미장센은 불안함을 고조시키는 노르스름한 빛의 질감과 몰입을 방해하는 부족한 그래픽 처리가 뒤섞이며 만들어진다. 굉장히 아쉽다. 그래픽 작업에 조금 더 공을 들였다면 어땠을까. 전체적으로 해당 시퀀스는 <매드 맥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래서인지 생생한 날 것의 질감이 아니라 아쉽다. 극에 드러나는 적당히 다듬어진 그래픽의 질감은 묘한 반감을 불러온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20)
독일 표현주의 사조의 대표작이다. <노스페라투>와 이 작품은 후대의 호러, 누아르 필름을 포함한 많은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면서 고전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이 작품만의 가치가 한결같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세트와 배경 요소들,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와 분장, 이야기 구성 방식(액자식, 반전)은 모두 기교와 치장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왜곡된 미장센과 재치 있는 내러티브의 효과적인 결합이 지향하는 지점 끝에는 전쟁 이후의 어두운 독일 사회가, 그 사회에 처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내면이 있다.
<마녀> (유영선, 2013)
2018년 개봉된 박훈정 감독, 김다미 주연의 <마녀>가 아니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사랑받지 못한 자의 뒤틀린 애착 욕구가 빚어낸 이야기를 다룬다. 배우의 퍼포먼스가 상당히 중요한 작품인데,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신세영' 역의 박주희 분은 흡입력 강한 연기로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영화에 표현된 세영의 서사는 불친절하다. 그녀의 사연은 진실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으며, 서사의 시작점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어렴풋이 드러나는 정보에만 의지하면서 극을 따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박주희 배우는 이 어려운 캐릭터의 빈 공간을 연기력으로 메꾼다. 다만 그 이외의 요소는 큰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미몽> (양주남, 1936)
카메라 속에 담긴 시대상을 음미하는 재미가 있다. 적절한 은유와 간단하면서도 굴곡이 분명한 서사를 통해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영화다. 일제의 영향을 받았던 1930년대의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영화 제작 환경 등의 외부 요소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상과 캐릭터를 연결 지어 감상하는 법도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종각> (양주남, 1958)
이 영화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대를 살아간 종쟁이의 삶을 다룬 영화다. 종쟁이 석승은 세 명의 여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 영화는 당대 상업 영화들 틈에서 제작된 예술 영화 성격이 짙은 작품이었다. 정적인 촬영 방식과 롱테이크, 대상과 거리를 두는 롱 쇼트 등이 제법 쓰였다. <미몽>에서 속도감을 녹여낸 몽타주 등 기교 있는 편집을 보여준 양주남 감독은 이 작품에선 다소 힘을 뺀 채로 한 예술가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노년의 석승 곁에 있는 영실을 석승과 대비시킨다. 석승과 영실이 나타내는 인간상을 염두에 두고 감상한다면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리미트리스> (닐 버거, 2011)
알약 섭취 유무에 따른 시각적 연출의 차이가 몰입을 돕는다. 다만 과하다 싶은 몇몇 지점은 보면서 살짝 어지러웠다. 적당히 흥미로운 소재만으로는 영화 전체를 이끌어갈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쾌감을 느꼈던 장면이 잔상처럼 지나가는데, 그 이후엔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파악할 수가 없게 된다.
<무간도> (맥조휘, 유위강, 2002)
<신세계>가 이 작품을 많이 참고했다고 들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니 두 영화는 비슷한 듯 다르다고 느꼈다. 주요 설정이 유사하긴 하지만 <무간도>와 <신세계>의 지향점은 살짝 다르다. 이 작품은 두 남자의 극적 대비를 통해 인간 내면을 향한 고찰을 환기하고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관객의 생각을 묻는 반면, <신세계>는 열린 질문이 아닌 다듬어진 주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풍성하게 꾸며 놓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엑시트> (이상근, 2019)
이렇게 '선을 지킨'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어느 방면에서 살펴도 모난 곳 하나 없이 완벽히 둥근 형태를 띤 이 작품은 근래 보기 드문 한국 상업 영화라고 생각한다. 재난과 코미디를 배합한 장르 요소, 사회상을 환기하는 장치들, 촬영과 편집 방식, 인물 설정 및 내러티브 구조 등 어느 부분에서든 이 작품은 과하지 않게 적정선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