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영화

2020.07.24-2020.07.30

by 드플레

<올드 가드>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2020)


불멸자는 목적 없는 삶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운명에 갇혀 많은 것을 포기하며 인류를 구원한다. 이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산다는 말은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운명에 갇힌 불멸의 존재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근시안적 발상에 사로잡힌 현대의 인간은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으로부터 감히 미래를 예측하며, 계획을 세우고 운명을 짐작한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일까?


그런데 불멸자도 갑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필멸자가 되기도 한다. 성서에 의하면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 불멸자(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필멸자(인간)는 어디까지 같고 어디부터 다른 것인가.


이야기 구성, 인물 설정 속 대립 구조가 눈에 띈다. 불멸-필멸이라는 가장 큰 틀에서 시작해서 앤디-나일의 세세한 배치까지. 여러 방면으로 조금씩 아쉽다. 이야기, 촬영 구도, 액션, 음악 등 어딘가 어긋나는 지점들이 누적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헐겁다.


죽기 위해 끝내 동료의 믿음을 저버린 자(부커)와 죽지 못해 동료를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자(꾸인)가 꾸려나갈 후속작에 기대를 걸어본다.






<범블비> (트래비스 나이트, 2018)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그린 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래서 특별하지는 않다. 게다가 '트랜스포머' 시리즈 세계관에 속하는 스핀 오프 작품인 탓에 친근하면서도 진부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자신만의 강점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기존 시리즈가 남긴 잔상을 최대한 지워내고 몇 가지 주제를 잡아 화려하지 않지만 밀도 있게 집중한다. 액션은 꼭 필요할 때만 등장한다. 범블비와 찰리의 동반 성장 서사는 진중하면서도 유쾌하다.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들이 상당히 많아서 장점이 희미해진다.






<분노의 질주: 홉스 앤 쇼> (데이빗 리치, 2019)


<존 윅>, <아토믹 블론드>, <데드풀 2>를 연출한 데이빗 리치의 작품답게 액션은 화려하다. 맨몸 액션 신은 물론이고 오토바이와 차량이 등장하는 추격 시퀀스, 후반부 헬기-차량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다만 현실성은 많이 떨어져서 킬링 타임으로만 마냥 즐길 수 없는 지점도 분명히 있다. 납득이 안 갈 정도로 밸런스가 맞지 않는(주인공이 훈련받은 용병들을 손쉽게 제압하는 장면, 슈퍼히어로물 오마주 등) 상황이 반복된다면 상당히 피로해진다.


새로운 장소로 전환될 때마다 익스트림 롱 쇼트 대신 카툰 형식의 분할 화면으로 장소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 홉스(드웨인 존슨 분)와 쇼(제이슨 스타뎀 분)의 모습을 동시에 담는 화면 구성은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흥미를 유도한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2인, 3인의 콤비 플레이가 갑자기 홉스의 고향인 사모아로 넘어가면서 유사 팀플레이로 탈바꿈한다. 현대 문명과 다소 떨어진 이질적인 공간이 주는 정겹고 신비한 기운도 잠시, 제작자로도 참여한 드웨인 존슨의 의견이 과하게 반영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가족, 사랑, 우정, 팀스피릿을 강조하는 다소 황당한 해당 설정은 <홉스 앤 쇼>를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장치이긴 하다.






<6 언더그라운드> (마이클 베이, 2019)


설정은 흥미로웠다. 각 분야의 능력자들이 팀을 이뤄 세상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사망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관을 짜서 장례식도 치렀고, 문서 상으로는 죽었으니 흔적이 없는 유령 같은 사람들이다. 신원 노출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작전 수행에 용이하다. 이들조차도 서로 팀으로 활동하며 신원을 공유하지 않는다. 초반부의 묘사는 정신없긴 해도 이목을 끈다. 그런데 결국은 용두사미. 팀을 구성한 백만장자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라 동료일 뿐이라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전개를 따른다.


'폭발 장인' 마이클 베이다운 화끈한 액션 연출이 돋보인다. 셰이키 캠, 핸드 헬드, 슬로 모션 등 각종 촬영 방식, 편집 기법이 총동원됐으며 고공 액션, 카체이싱, 파쿠르, 총기 액션, 과학 요소와 주변 사물 활용 등 다채로운 재료를 한껏 스타일리시하게 손질해서 코스요리로 내놓았다. 요리의 맛은 좋지만 먹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려서 생각보다 피곤하고, 다 먹고 나면 배부른 느낌 없이 공허하다. 그런 영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 1984)


나우시카는 다른 인간과 다르다. 피상에 얽매여 이해관계를 따지고 들지 않는다.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과 사랑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나우시카가 끝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다. 나우시카가 갈등 해결의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우시카를 구원자(메시아)로 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도 있다. 나우시카를 구원자로 본다면, 대립 상황을 신과 같은 이상적 존재의 개입 없이는 타개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인류의 건설적 측면이 확장된 존재가 나우시카라면, 인류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게 된다.


애니메이션만의 회화성을 살리는 미장센이 아주 뛰어나다. 황폐화된 지구와 부해, 각종 생물과 조화를 이루는 화면 구성도 탁월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미술, 작화 팀이 만들어낸 화면은 생동감이 넘친다. 복잡하게 공중을 떠도는 곤충의 움직임, 평면적인 회전(날개나 프로펠러 등)만으로도 전해지는 바람의 질감, 기계요소와 인간, 생물이 한 화면에 담길 때의 조화는 당시 하야오 사단의 기술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 1986)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 중심의 사상이 퍼져나가면서 인류는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도구처럼 이용한다. 극 중 묘사된 세계는 아마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구성됐을 것이다. 감독은 이 작품에서 무거운 주제를 담아냈다. 주제의 진중함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관객에게 건네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를 신비의 섬 '라퓨타'에 얽힌 낭만, 순수로 가득한 모험담으로 근사하게 포장해서 선보인다.


이는 분명 직설적인 장치와 명료한 묘사로 주제 의식을 드러낸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방식과는 다르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다양한 은유로 가득 찬 작품이다. '라퓨타'의 상층부(자연)와 하층부(기술)가 다르고, 시타는 지배계층의 허식을 겨냥하듯 망해버린 나라에 왕이 필요하겠냐고 말한다.


아쉬운 지점도 몇 군데 있다. 파즈의 행동 동기는 처음에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이었는데 그 이후의 선택들은 어떤 근거로 하게 된 것인지 살짝 의문이 남는다. 상징적 장치가 많고 공간의 이동, 다양한 진영의 인물을 다루는 몸집 큰 모험담이라서 인물들 각각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부족하다.


작화의 퀄리티가 매우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그림에 더 눈길이 간다. 원초적인, 거친 느낌이 그리운 탓일까.







<400번의 구타> (프랑수아 트뤼포, 1959)


맞벌이 부모님, 엄한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세상 속에서 앙트완은 방황한다. 안정과 사랑이 필요했던 아이에게 진실된 관심을 가져준 이는 없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앙트완이 처한 상황을 실험적이면서도 세련된 영화적 기법으로 부각하면서 사회 비판적 메시지, 인물의 감정 변화, 갈등 관계의 확장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1950년대 프랑스의 젊은 영화인들은 기존 영화적 형식을 거부하고, 감독 중심의 '작가주의'를 주장하며 실험적인 시도를 도입했다. '누벨 바그'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앙트완의 서사는 뚜렷한 변곡점도 없고, 전체적으로 굴곡이 심하지도 않으며 인과적인 흐름도 느슨하다. 주인공은 목표와 야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앙트완을 보면서 관객은 이 영화를 '성장 영화'로 받아들인다. 문학적 서사 구조를 벗어났지만 이 영화의 구성은 문학의 그것과 비슷한, 아니 더 풍성한 효과를 준다.







<강철비 2: 정상회담> (양우석, 2020)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정보로 인해 각국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갈등 양상은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처럼 변한다. 통역의 재치 있는 반복과 지도 등으로 도식화된 정보는 잦은 장면 전환과 다층 대립 구도의 산만함을 간간이 정리하고 적절히 보완한다.


영화 콘셉트 상 캐릭터와 내러티브 구조를 잘 버무려서 장르 특징을 살려야 한다(제목부터 '정상회담'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작품 속 주요 인물은 대체로 일관된 정서를 유지하고 극적 변화를 동반하지도 않아 매력이 다소 떨어진다. 감독은 한경재(정우성 분)를 시종 희생과 관용, 인내만을 뚝심 있게 견지하는 캐릭터로 설정하여 극의 중심에 배치한다. 이 전략은 한경재와 얽힌 각국 정상들, 주변 인물들이 더 입체적이었다면 훨씬 근사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주요 캐릭터의 핵심 면모가 극을 이끌어가는 키워드로 작용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선 인물의 성격, 특질 등의 요소가 순간의 흐름마다 말초적 자극을 주기 위한 도구로 가볍게 소비된다. 극을 이끌어 갈 동력이 없어져가는 찰나, 잠수함 내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액션 신과 서스펜스 첨가로 잠깐 몰입도를 높일 뿐이다.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팀 버튼, 2007)


음울한 잿빛 거리는 씁쓸한 풍자의 대상이 되고 피 튀기는 시뻘건 복수는 정념에 휩싸인 인간 내면을 들춘다. 무분별해 보이는 토드의 살육은 그의 정신 상태를 표현한다. 살짝 침체된 듯한 뮤지컬 스코어와 의상,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미술 등 화면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팀 버튼의 설계에 따라 조직된다. 꽤나 흥미롭다. 불안과 혼돈의 잔혹한 비극이 이런 계획된 근사한 조합을 통해 완성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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