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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리 아닌 자(들)

-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by 세니사

3개월의 공무원 시험 준비 그리고 합격

두 번째 공장에서 알게 된 한 언니의 배려로 그 언니의 고향집에서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게 됐다.

겨울 초입에 내려간 바닷가 마을은 추웠다. 배가 들어오는 날은 부두에 나가 노가리의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빼낸 후 작은 몸통들을 건조망에 널었다. 손발이 언 채 여섯 시간 남짓 일하면 1~2만 원의 돈을 벌었다.

배가 들어오지 않는 날은 공부를 했다. 학력고사를 본 지 4년이 지나 있었다. 잊은 내용들을 다시 익히고 익힌 내용들의 회상 수준을 높이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다.


이듬해 2월, 인천시 교육행정직 9급 시험에 합격했다. 8월 초, 산자락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 행정실 책임자로 발령이 났다. 교감이 행정실장 역할을 해 와 교무실과 행정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10년을 근무하며 행정 실무를 봐 온 아홉 살 연상의 기능직 부하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 입장에서는 연수조차 받지 않은 스물네 살 초임자가 행정실 책임자로 온 일이 언짢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연수도 못 받고 업무를 시작하게 된 내 난감함을 이해했다. 덕분에 나는 유능한 부하 직원에게 일을 잘 배웠다. 공채 출신 일반직과 특채 출신 기능직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갈등도 겪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친절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교사와 행정직원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이질감은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 큰 이질감은 발령 후 두 달쯤 지나 받게 된 연수에서 경험했다.



삶의 시공간이 담긴 말

경기도와 인천의 그해 9급 교육행정직 합격자들이 대상인 직무 연수였다. 한 달의 숙박 연수 동안 만났던 그 많은 낯선 이들은 근무처와 이름을 나누고 나면 흔히 이렇게 물었다.


“몇 학번이세요?”


훗날,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신 주제를 알라는 듯 한 검사가 대통령에게 던졌던 질문. 바로 그 질문을 한 달 동안 꽤 많이 받았다. 물론 그들에게 훗날의 그 검사처럼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나이를 묻는 습관화된 질문 방식일 뿐이었다.

대체로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일하는 세상에 검정고시 고졸 학력의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난감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에서 익힌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은 이미 어떤 사회적 관습이나 가치에 의해 길들여져 있고 우리는 그 시공간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길들여진 대로 자신이 살아가는 시공간을 보다 공고히 길들인다. 따라서 누군가 특정한 관습과 가치에 깊이 잠긴 채 그 관습과 가치를 실현하고 보존하는 일을 그릇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에 “대학 안 다녔습니다.”로 답하는 이들이 몇이라도 같은 시공간에 있다면, 질문을 건네는 쪽이 질문을 조율할 수는 없을까. 대학을 거친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말이나 행동은 ‘우리’와 ‘우리 아닌 자’를 구분하기 위한 거름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그 질문의 본질이 무엇이든 이왕 발 들였으니 스스로 당당해질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연수를 마쳤다.

하지만 기어이, 내가 느낀 이질감들이 실체가 되어 나를 몰아붙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삶의 조건들

약 2년 후 다시 발령이 났다. 학급수가 꽤 많은 시내 초등학교였다. 7급 행정실장이 있어야 하는 규모였다. 9급인 내가 그 자리로 가게 된 이유는 곧 알게 됐다. 관례에 따라, 그동안 근무해 온 학교의 교장이 새 발령지 교장에게 나를 데리고 가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새 발령지의 교장은 자리도 권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어딜 감히 대학도 안 나온 9급짜리 여자애를 보내! 이것들이 내가 정년 퇴임 얼마 안 남았다고 무시하는 거야!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분해서 소리치는 교장이 쏟아낸 첫 문장에 담긴 모든 단어가 내가 어쩔 수 없는 내 삶의 조건들이었다. 생득적 조건(여자), 환경적 조건(학력), 살아온 세월(나이), 공무원 생활 연수(직급). 나의 조건들이 그 교장에게는 모욕이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무엇이 그에게 가장 심한 모욕감을 주었는지 나를 데리고 간 교장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간 교장은 9급이어도 일은 잘하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거듭 말했다. 소용없었다.


교장은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욕의 몇 배를 매일 내게 돌려주었다. 행정실의 내 부하 직원과 교사 들 앞에서. 뒤늦게 내막을 알아봤다. 내가 속한 교육청 소속의 모든 7급들이 그 교장의 성정을 익히 알아 그곳 발령을 기피했다. 상황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싫다 좋다 말할 수 없는 9급에게 떠넘겨진 자리였던 것이었다.

몇 달을 견뎠지만 결국 행정실을 없애 교무실로 옮기고 행정실의 모든 업무는 교감의 지시를 받으라는 교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교장과 행정실장은 상하 관계이다. 하지만 총액이 큰 계약을 진행할 때, 교장이나 행정실장이 업자로부터 사례를 받거나 단가 조작으로 횡령을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호 확인할 의무가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또한 수업이 본래 업무인 평교사들은 최대한 많은 문서 작업이 행정실에서 처리되기를 바랐다. 그러니 행정실장이 업무 조율에 실패하면 적은 행정실 인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일이 행정실 몫이 되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행정실 폐쇄는 나에 대한 모욕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지치기도 했고 알량한 책임감이 발동하기도 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새로 온 행정실장은 타지에서 막 들어와 그 교장에 대해 알지 못하는 7급의 40대 남성이었다. 교장은 조용해졌다.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날 그가 물었다.


“일을 아주 잘하시는데 왜 그만두세요?”


헛웃음이 나왔다. 교장의 비난과 모욕이 나의 무능 탓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자존심은 지킨 셈인가. 그렇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의 조건들에 대해 가졌던 교장의 분노와 멸시가 정도를 넘었다 해도, 그것이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사회라는 시공간에 공고히 새겨진 관습과 가치에 기반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 마당에.



‘우리’와 ‘우리 아닌 자’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사다리를 걷어찬 우리 사회는 ‘우리’와 ‘우리 아닌 자들’을 나누는 데 한층 이골이 나 있다. 남자/여자, 나이 많은 사람/적은 사람, 대졸자/고졸자, 명문대 출신/비명문대 출신을 가르는 오랜 구분선 외에도 정규직/비정규직, 특목고 학생/일반고 학생, 영어 유치원 자녀/한글 유치원 자녀, 일반 분양 아파트 거주자/임대 아파트 거주자, 강남 거주자/비강남 거주자, 권력과 부를 물려받은 집안/자수성가한 집안, 금수저/은수저/흙수저/노수저... 점점 더 많은 구분선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고연전인지 연고전인지에서 야구 중계를 하던 학생이 상대 학교의 감독에게 했다는 말은 ‘우리 아닌 이들’에 대한 감각이 이질감을 넘어 적대감과 멸시감으로 굳어진 현실을 새삼 직시하게 한다.


“사람한테 가정환경이 중요한 게, 부모님들한테 사랑을 못 받은 것 같다, 혹시나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나한테 사기 치는 건 아닐까, 의심과 불만이 태생적으로…”


고통받는(은) 자에 대한 연민은 고사하고 그의 고통을 욕으로 만들어 유희하는 사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우열의 뿌리 깊은 관습을 나날이 공고하게 새겨 넣는 사회. 생득적 조건이나 환경적 조건이 불리한 이들이 이런 사회에 던져진다면 투쟁심을 불태워야 하나 자포자기해야 하나.


처음부터 자포자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우선은,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고자 관대하지 않은 사회뿐 아니라 자신과도 싸우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보다 많다. 나도 그랬다. 젊고 순진했던 당시의 나는 능력과 성실이 인정받는 곳을 찾게 되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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