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자유가 초래한 문명의 탐욕과 오만

- 파라마운트+의 드라마 《1923》

by 세니사

* 이 글에는 상당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모른 채 작품을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파라마운트+가 제작한 드라마 《1883》의 키워드가 자유와 야성이라면, 《1923》의 키워드는 탐욕과 오만이다. 《1923》은 타락한 자유를 내면화한 문명의 탐욕과 오만을 세 가닥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첫 번째 서사 : 폭력과 탐욕을 내면화한 문명인

첫 번째 서사는 제이컵 더튼(《1883》의 주인공 제임스 더튼의 형)이 더튼 가의 부지를 탐하는 배너와 휫필드에 맞서 치르는 전쟁이다. 그런데 함께 더튼 가의 부지를 강탈하려는 배너와 휫필드는 탐욕의 동기가 서로 다르다.

가난한 배너의 탐욕은 가족의 생존과 안녕에 기인한다. 부유한 휫필드의 탐욕은 타인을 제압하고 그의 것을 탈취하는 행위에서 느끼는 쾌락에 기인한다. 작품에서 휫필드는 악인일 뿐 아니라 문명의 내면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도시는 문화와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을 빼앗습니다. 길들지 않은 땅을 누비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을 채울 수가 없죠. (...) 자유를 갈망하는 짐승이니 우리가 그 기회를 주는 겁니다.”(시즌 2, 8화)라는 휫필드의 말은 타락한 자유를 내면화한 문명의 민낯을 명확히 드러낸다. 《1883》에서 교활한 문명을 거부했던 엘사가 추구했던 야생적 자유가 문명 안에서 탐욕과 쾌락의 동기로 타락한 셈이다.

주목할 점은 타락한 문명인 휫필드의 공격을 받는 제이컵이 휫필드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큰할아버지 제이컵에게 휫필드와 제이컵 둘 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자신들이 만든 법을 직접 집행하는데, 옳고 그름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 잭의 말에서 두 사람의 유사점은 선명하다. 더욱이 제이컵은 잭의 물음에 그런 건 없다고, 우리 가족한테 좋은 게 뭔지만 생각하고 법을 활용하는 거라고(시즌 1, 7화) 답한다.

실제로 제이컵은 더튼 가의 산에 양들을 몰고 와 풀을 먹인 배너 무리를 목매달아 죽인다. 합법적 살인이니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 서부에 대토지를 확보한 더튼 가의 폭력은 엘사의 내레이션처럼 대를 이어온 것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폭력에 시달렸다. (...) 폭력이 따라오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찾아 나선다.” - 시즌 1, 1화



두 번째 서사 : 강자조차 위태로운 문명 세계

두 번째 서사는 전쟁터와 아프리카로 폭력을 찾아 나선 스펜서 더튼(《1883》의 주인공 제임스 더튼의 셋째 자녀)과 영국 귀족 알렉산드라(앨릭스)의 사랑과 고난을 다룬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영웅 스펜서는 부대가 전멸한 후 아프리카로 간다. 그곳에서 영국인들에게 돈을 받고 맹수를 죽이는 사냥꾼으로 살아가다, 앨릭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스펜서는 앨릭스에게 고백한다. “오랫동안 난 뭔가 죽여야만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시즌 1, 3화)라고. 스펜서를 지배해 온 야성과 폭력이 사랑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그런데 옐로우 스톤에 전쟁이 벌어졌으니 돌아오라는 큰어머니의 편지를 뒤늦게 확인한 스펜서는 앨릭스와 함께 서둘러 귀향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들의 귀향길은 영국 귀족 아서의 탐욕과 오만으로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된다.

간신히 도착한 몬태나에서 스펜서는 가문과 영토를 지켜내지만 앨릭스를 잃는다. 강자조차 자신과 가족의 목숨 그리고 사랑을 지켜내기 어려운 세상, 이것이 작품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폭력과 타인의 고통은 불가피하다. 제이컵에게 폭력과 무심은 생존 수단이고, 휫필드에게 폭력과 무심은 쾌락 수단이라는 차이가 있다 한들, 약자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겨울의 자연과 다를 바 없이,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한 강자들 앞에서 약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품은 세 번째 서사에서 답을 제안한다.


세 번째 서사 : 오만한 강자에게 던져진 약자의 길

세 번째 서사는 원주민 학교에서 문명인의 폭력에 시달리던 크로우족 소녀 티오나의 투쟁을 그린다. 《1883》에서 미국 서부의 원주민들이 가졌던 힘은 《1923》에서 백인들에 의해 모두 강탈되어 있다. 원주민 아이들은 가족과 강제로 분리되어 기숙학교에 감금된 채 백인 문명인들의 오만에 찬 학대에 시달린다.

메리 수녀는 티오나에게 “넌 야만인이야. (...) 너도 늑대처럼 개가 되는 법을 배워야지. (...) 난 널 구원하려는 거란다, 얘야. 너라는 가장 악랄한 적으로부터.”(시즌 1, 4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티오나는 순종을 거부하고, 자신을 학대한 두 수녀를 살해한 채 탈출한다.


도피 과정에서 가족과 자신을 도운 이들을 모두 잃은 티오나는 그나마 한 여성 보안관의 도움으로 수배자 신세를 면한다. 재판장을 나와 갈 곳도, 함께 할 사람도 없이 홀로 마을을 떠나는 티오나에게 인디언 보안관보는 “맞서 싸우길 잘한 거”(시즌 2, 8화)라고 말한다.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맞서 싸움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일. 성공하리라는 희망 따위 없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 들 나의 존엄을 누군가는 인정해 주리라는 기대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떳떳할 뿐.


타락한 문명을 살아가는 각자의 선택

안타깝지만, 문명은 정복한 땅 위에 계속 새로 세워져 왔다고 제이컵은 말한다(시즌 1, 2화). 오늘 존재하는 모든 문명이 보다 약한 문명의 피로 세워진 이상 어떤 문명도 결백할 수 없다. 그러니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맹자의 주장은 속절없다.

배속에 스펜서의 아이를 품은 채 홀로 온갖 위험과 모멸을 겪으며 간신히 자유의 나라 미국에 도착한 앨릭스는 입국 심사 과정에서 최악의 모욕을 겪는다. 그녀는 최종 심사관에게 “당신들은 어떠한 예의나 연민도 없이 날 대했어요. (...) 내 입국을 불허하시겠다면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예의는 차리세요.”(시즌 2, 3화)라고 말한다. 문명은 백인이라 해도 타자로 규정한 이들에게 이토록 야만적이다.

어쩌면 《1923》에서 더튼 가와 휫필드를 가리는 희미한 경계선이 문명의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상대적 강자 제이컵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아내와 자식은 살려달라는 배너의 부탁을 수락한다. 무고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제이컵의 공정이 첫 번째 경계선이다.

그러나 작품이 조금 더 선명히 보여주는 경계선은 연민이다. 스펜서는 귀향길에 부득이하게 밀주를 운반하다 이탈리아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창녀의 밧줄을 끊어준다.


오늘날, 연민은 더 이상 인간의 본성도 공동체의 이념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지로 남겨졌을 뿐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순종할 것인지 죽도록 싸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듯, 강자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선택해야 할 뿐이다. 만약 연민의 바깥에 서기로 한 강자라면, 앨릭스의 말처럼 최소한 예의는 차려야 하리라. 지구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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