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망에 관하여
“글을 써 보면 어때요?”
오래전, 한 지인이 만신창이가 된 내게 권했다.
글자를 깨친 뒤로 줄곧 활자의 자력에 끌렸다. 과자 포장지에 쓰인 상품명, 전신주에 붙은 구인 문구, 신문 기사 제목, 거리의 간판……
책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은 대학에나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학급 문고를 운영하면 교실에 비치된 모든 책을 읽었다.
책에 끌리는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작가가 되고 싶었다. 5학년 때 과학 경진 대회에 참여했지만, 선생님의 뜻이었다. 내 관심사는 사물보다 글에 있었다. 특히, 이야기 글. 훌쩍,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열두 살 때부터 집안 살림이 내 몫이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사회인이 되었다. 살림과 돈. 일찌감치 내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운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오늘 같을 내일이 반복되는 생이라면 차라리 끊어버리고 싶었다.
절박함 그리고 형제와 타인들의 도움으로 일하는 틈틈이 조금씩, 그래서 늘 몇 박자 늦게 공부를 해나갔다. 의상실 시다로 시작한 사회생활이 대학원 조교에 이르기까지, 숱한 직업을 거치며 오전/오후에는 돈 벌기, 저녁에는 살림이나 육아, 밤에는 공부를 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책에 파묻혀 일할 기회가 왔다. 호재였다. 그러나 회사에서 내게 맡기는 일은 책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만이 아니었다. 자꾸 영역이 확장되는 일들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밤낮이나 휴일 없이 일하면 해결됐다. 문제는, 도저히 해낼 자신이 없는 영역의 일마저 무조건 해내기를 요구하는 상사와의 관계였다. 성취감과 불안감에 뒤범벅되어 몇 해를 보낸 끝에 나를 무너뜨린 건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였다.
한 지인이 글을 써 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때가 그때였다. 배신감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사직한 채 좌절감에 허우적거리던 때.
엄청나게 읽어댔지만, 일기 외에는 내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다. 한숨, 절망, 자기 연민의 흔적들이 혐오스러워 수시로 없애 버린 일기들. 그게 다였다.
한 문장 쓰기 강좌를 시작으로 소설 쓰기, 시나리오 쓰기를 이어 들었다. 여러 편의 허구를 지었다. 주로 단편이었고 한 편만이 장편이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허구의 서사들은 모두, 내 삶의 혼란들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랬다. 사건과 인물을 변형시켰기에 술자리를 거듭 같이하며 온갖 얘기를 주고받은 글쓰기 동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의 문제들을 인물의 문제로 변형시키니, 표면적 문제에 숨겨진 진짜 문제를 보게 됐다. 놀라웠다. 변형된 인물과 변형된 문제 들은 나 그리고 내가 겪은 문제들과 분명 외형이 달랐다. 하지만 내게 박혔거나 내게서 돋아난 가시와 본질이 같았다.
이를테면, 한 단편소설의 주인공은 자연임신이 되지 않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휴직까지 단행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인공수정에 성공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수정란을 이식받지 않고 냉동시켜 보관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여성이 수정란을 냉동시킨 궁극적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나의 욕망에 닿아 있었다. 감춰져 있던 진짜 문제나 욕망을 타자화시켜 응시하는 작업은 때로 고통스러웠고 때로 위로가 됐다.
장편을 쓸 때 허구의 인물이 자기주장을 하며 내 계획에 어깃장을 놓는 순간은 경이로웠다. 창조주인 나와 피조물인 인물이 맞서는 길항의 시간, 그것은 나를 통과해 나를 넘어서는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신기하고 후련했다. ‘나’를 통해 쓰이지만 나를 벗어나는 인물과 글이 믿음직했다. 글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이해됐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그때의 글쓰기는 내 안에 가시들을 무디게 만들거나 빼냈다. 하지만 순기능만 하지는 않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본질적 문제나 오랜 시간 외면했던 심정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거듭되면서 혼란에 빠졌다. 돈 버는 일에 요구되는 평정심과 규칙성이 흔들렸다. 글쓰기를 중단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글쓰기를 재개했다.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이런 모양으로 있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넉 달에 걸친 글쓰기를 통해 얼마간 납득했고 받아들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이만큼이어도 괜찮다.
무엇보다,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슴푸레 알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때 만나게 될 ‘나’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보다 메를로퐁티의 ‘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는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난 창이 될 것이며, 그렇게 쓰인 글은 나와 타인의 살아감 그리고 세계의 소란이 뒤섞인 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