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희생에서 자발적 헌신으로

-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크리스 밀러, 필 로드 감독)

by 세니사

*** 이 글에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과학적 지식이 적절히 녹여진 하드 SF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들의 마음은 그레이스와 로키의 우정, 그리고 그레이스의 성장에 대한 감동으로 따뜻해지므로 이 작품은 소프트 SF이기도 하다. 본 글은 잘 짜인 이 서사에 내장된 의미, 즉 소프트 SF로서의 면모에 주목하려 한다.


흔들리는 영웅 서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언뜻 ‘인류를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를 구해야 하는 그레이스 박사는 영웅적 자질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작품 초반, 그는 수업에 통 관심이 없는 중학생들을 어떻게든 수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애를 먹는, 평범한 과학 선생이다. 심지어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 가까운 과거에 따르면, 그는 얼마간 실패한 자이다. 원래 대학 교수였지만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론을 고집하면서 학계 권위자를 대놓고 조롱하여 해고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의 비-영웅성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날 예정이던 과학자가 출발 사흘 전, 폭발 사고로 사망한 직후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우주로 떠날 인물들의 임무는 천체를 먹어 치우는 바이러스 ‘아스트로파지’가 온갖 항성과 행성을 감염시키고 있는데, 왜 타우세티 행성만이 감염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문제는 우주선에 실을 수 있는 연료의 한계로 이 비행이 편도라는 것이다. 즉, 가면 돌아올 수 없다.

‘헤일메리 프로젝트’ 팀장 에바와 팀원들이 그레이스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하자, 그레이스는 고심 끝에 말한다.


“해결책이 있겠죠. 내 자리는 교실이에요.”


에바는 태양의 밝기 변화로 30년 후에는 인류의 4분의 1이 죽게 된다며,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레이스를 설득하려 하지만, 그레이스는 계속 거절한다. 결국 에바의 결정에 따라 팀원들은 혼수상태 유도 약물을 그레이스에게 강제로 주사한다.

그런데, 땅바닥에 쓰러뜨려져 온몸을 제압당한 채 ‘No!’를 외쳐대는 그레이스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에게 강제로 주사를 놓는 팀원들의 행동을 보는 순간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되는가?

이 혼란에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 안에서, SF 연구자 다르코 수빈이 제안한 SF의 핵심 기능, ‘인지적 소외’가 시작된다.


인지적 소외와 노붐 :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다르코 수빈은 SF를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세계를 낯설게 만들되, 그 낯섦이 이해 가능한 논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빈은 이러한 낯섦을 만들어 내는 핵심 장치를 노붐(novum)이라고 부른다. 노붐은 단지 신기한 ‘소재’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를 초래하는 주요 요소다.

영화에서 지구의 인류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이는 극한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다.


그러나 강제로 우주에 보내진 그레이스가 타우세티 행성 근처에서 만난, 에리드 행성의 ‘로키’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로키 또한 에리드 행성을 구하기 위해 아스트로파지를 조사하러 왔다. 에리드의 지적 생명체 스물셋이 함께 출발했지만, 로키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이제 임무 완수의 책임은 오로지 로키에게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그레이스의 목숨이 위태로운 매 순간, 임무보다 그레이스의 목숨을 지키려 한다. 마침내 그레이스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순간, 망설임 없이 에리디의 운명과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보호막을 부수고 뛰쳐나와 그레이스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키의 행동이 낳을 수 있는 결과를 헤아리며 우리는 묻게 된다.


공동체를 우선하는 지구 인류와 한 생명을 지키려는 로키, 누구의 선택이 옳은가?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어 온 선택이 사실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성립하는 가치일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익숙했던 세계는 더 이상 익숙하지 않게 된다. 작품에서 이 소외를 가능하게 한 노붐이 바로 다른 윤리 체계를 구현하는 존재 로키이다.


행동으로 구성되어 가는 용기

로키는 활기차고 호기심이 많다. 산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보호구 안에서 다섯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그레이스의 우주선으로 굴러 들어온 로키는 사방을 탐색한다. 그러더니 제 우주선을 떠나 그레이스의 우주선에 눌러앉는다.

그레이스는 로키와 함께 생활하면서 타우세티 행성의 아스트로파지를 채집하고, 거기서 아스트로파지의 포식자 원생생물(타우메바로 명명)을 발견하고, 타우메바를 배양한다. 이 모든 일은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크고 작은 위험을 감수했기에 가능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로키는 타우메바를 가지고 에리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그레이스는 타우메바를 지구로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로키는 그레이스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남을 도우려고 희생을 무릅쓰는 그레이스에게 단어가 필요하다.”


그레이스는 로키에게 ‘용감한’이라는 영어 단어를 알려 준다. 이제 그레이스는 먹먹하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한다. 그런데 원래 우주선을 탈 계획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폭발 사고로 죽은 과학자와 아스트로파지로 에너지 만드는 일을 맡았던 그레이스가 용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레이스 : 저는 여러분 같은 용기 유전자가 없어요.

과학자 : 유전자가 아니에요. 용기를 내게 해 줄 누군가가 있으면 돼요.


우주로 내몰린 후 그레이스가 갖게 된 용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하나하나 해내는 행동들이 축적되고, 로키와 함께 한 시간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마음의 상태인 셈이다. 그 마음의 상태를 알아봐 주는 로키에 의해 사후적으로 명명된 ‘용기’.

결국, 이렇게 ‘형성된’ 용기는 지구와 에리드를 구할 뿐 아니라 그레이스의 삶도 변화시킨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로키가 자신의 귀환 예정일을 6년 이상 늦추며 연료를 나누어준 덕분에 그레이스는 지구로 향한다. 그런데 제노나이트 용기에서 배양되며 제노나이트를 투과할 수 있게 진화한 타우메바가 용기를 뚫고 나와 우주선 연료인 아스트로파지를 먹어 치운다. 그레이스는 문제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수습하지만, 로키가 이 일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무인 탐사선에 타우메바를 실어 지구로 보내고 자신은 로키의 우주선을 찾아 나선다. 지구로 돌아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삶이 아니라, 로키를 구하러 가는 헌신을 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리드의 과학자들이 그레이스를 지구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때에도 그레이스는 에리드를 떠나지 않는다.

야외 교실에서 에리드의 어린 지적 생명체들에게 수업을 하며, 그레이스는 지구 교실에서 했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한다.


“빛의 속도에 대해 말할 사람?”


신나게 손을 들며 팔짝팔짝 뛰는 어린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그레이스의 얼굴을 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안도와 기쁨이 가득 찬다.


남겨진 질문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내적 서사는 두 개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지구의 가치 체계를 낯설게 만드는 인지적 소외의 구조이다. 다른 하나는 강요된 희생에서 자발적 헌신으로 나아가는 성장 서사이다. 그리고 이 두 층위는 연결되어 있다. 로키로 상징되는 노붐이 만들어 낸 윤리적 낯섦이 없었다면, 그레이스의 성장은 일어날 수 없었거나 그로 인한 감동이 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 짜인 서사에 끌려 깊은 감동을 안고 상영관을 나선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새삼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구의 땅바닥에 짓눌린 얼굴로 ‘No!’를 외치던 그레이스의 얼굴. 그러니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하나의 질문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극한의 상황이라면, 공동체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합리성은 불가피한 것인가.


*** SF에 관한 이번 연재는 이 글로 일단 종료하겠습니다. 다른 주제로 연재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SF에 관한 연재는 2~3개월 후 새로운 브런치북으로 재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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