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미 마인』(배리 B. 롱이어)
약 1천900년 동안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은 적이었다. 그들이 그 긴 세월을 적으로 보낸 이유가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민족적 차이 때문인지, 경제적 이권 때문인지, 정서적 반감 때문인지, 이 모든 이유 때문인지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이 두 종교 집단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제 그들은 매우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적이었던 집단들이 적이 아니게 되거나 협력 관계로 전환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렇다면 ‘적’은 분명한 실체인가, 상황이 구성한 관계인가?
『에너미 마인』은 이 의문에 관한 사유를 가상의 행성에 사는 ‘드랙’이라는 지적 생명체와 지구인의 관계를 통해 그려낸다. 작품은 드랙 종족과 지구인의 전쟁으로 시작한다.
적이 되는 이유 : 소유와 다름
드랙 종족과 지구인이 서로를 죽여 없애는 이유는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의 광물자원 때문이다. 신석기 혁명 이후로 한정된 재화의 차지와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는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에너미 마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드랙 집단과 지구인 집단이 서로를 증오하는 이유가 광물자원의 소유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서로를 증오하는 감정은 무엇보다 ‘다름’에 기인한다. 그들은 외모가 다르고, 성 정체성이 다르고, 번식 방식이 다르다. 이 ‘다름’은 서로에게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혐오는 쉽게 증오가 된다.
‘누가 가질 자격이 있느냐’와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 이 두 조건이 결합하자 ‘우리’ 아닌 ‘너희’가 가지려 할 때 ‘너희’는 죽어 마땅한 자가 된다.
소유의 자격과 이질성, 이 두 조건이 적대 행위를 촉발한다면 조건이 달라지면 행위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배리 B. 롱이어는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을 바꾸어 본다. 소유를 생존으로.
친구가 되는 이유 : 생존과 외로움
드랙 종족 제리와 지구인 데이비지는 전투기 조종사다. 둘은 파이린 4호 행성 상공에서 서로를 공격하다 행성 표면으로 추락한다. 높은 파도와 혹독한 추위 그리고 식량의 부족이 생존을 위협하는 무인 행성에 제리와 데이비지가 고립된 것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소유’가 아닌 ‘생존’이 절박해지자 적대 행위에 제동이 걸린다. 타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협력할 때 생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제 타자는 더 이상 죽여야 할 ‘적’이 아니다. 나를 고독과 죽음의 위협에서 건져 올릴 동반자다.
그런데 이들은 서서히 생존, 그 이상으로 이동한다.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면서 친밀한 관계로 변해 간다. 결정적 사건은 데이비지가 높은 파도에 시달리다 정신을 잃은 채 17일이 흐르는 동안 제리가 그를 보살펴 살려낸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데이비지가 깨어난 직후 이들의 대화다.
“네가 내 생명을 구했어. (...) 왜지?”
제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데이비지, 모래섬에서 너 말했다. 고독, 지금 가베이한다.” [49쪽]
※ 드랙어 ‘가베이’는 지구어 ‘이해’쯤 된다.
『에너미 마인』은 두 존재가 적에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에 성마르게 이타성이나 희생을 소환하지 않는다.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해 행위한다. 다만, 그 이기적 행위가 어떤 조건에서는 타인을 위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데이비지도 마찬가지다. 제리가 출산 중에 자식을 낳고 죽는다. 인간 아기를 키워본 적 없을 뿐 아니라 드랙 아기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는 데이비지는 제리를 죽게 한 드랙 아기 자미스가 증오스럽다.
“왜 안 먹는 거야? 왜 똥도 누지 않지? 넌 왜 우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냐구?”
아기는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흥! 바위로 끝장을 내버렸어야 했어! 그랬어야 했는데….” [93쪽]
생존과 외로움의 조력자였던 제리를 죽게 한 아기가 데이비지는 짐스럽고 밉다. 제리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아기를 제리의 ‘가계 기록 보관소’ 앞에 서게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자신에 대한 제리의 ‘헌신’을 기억하지만 아니 그 모두를 기억하기에 한층 아기가 증오스럽다.
‘나’에게 무익한, 이 무력한 존재를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작품은 존재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한 우주 : 책임과 헌신
개인 간에든 집단 간에든 ‘나’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타자와 친구가 되는 일은 전략적으로 당연하다. 그런데 나에게 짐이 되는 타자와의 관계라면 어떨까. ‘나’의 심층은 아마도 이 관계에서 결정지어질 것이다.
작가는 데이비지가 제리의 아기를 죽여버리고 싶은 바로 그 순간, ‘나’에 대해 묻게 한다. 언젠가 제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한 우주 말이야, 데이비지. 저 밖의 우주는 하나야. (...)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같은 우주 안에 있어. (...) 너는 이 세계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어떻게 생각해? 너는 어디에 있는 거야? 너란 존재는 누구야?” (...)
“나는 나지, 누구긴 누구야.”
그렇지만 갓난아이의 머리 위로 돌덩이를 들어 올려 죽음으로 위협한 게 ‘나’란 말인가? 나는 외로움에 사무쳐서 장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96~97쪽]
인간과 드랙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같은 우주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즉, 인간과 드랙이 ‘아주 다른 존재’라는 인식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한 우주에서 나와 다를 바 없는, 무력한 생명체를 위협하는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자문 앞에 데이비지가 느끼는 외로움은 그 우주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동댕이쳐 돌이킬 수 없이 혼자가 된 듯한 낭패감이자 수치감일 것이다.
이 순간 데이비지는 필요의 관계를 넘어, 책임과 헌신의 관계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하나인 우주로의 도약인 셈이다.
새로운 공동체 : 가능성과 불가능성
그러나 이 작품은 따뜻한 화해와 인간성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데이비지가 선택한 책임과 헌신의 관계는 지구로 돌아가는 순간 무너진다.
전쟁은 끝났지만, 증오는 끝나지 않았다. 지구에서 데이비지는 ‘드랙 놈의 앞잡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드랙 종족에게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한 자미스는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철저한 교정 대상이 된다.
결국, 데이비지와 자미스는 파이린 4호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자미스의 드랙 가족들과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에서 유일한 인간인 데이비지가 죽고 나면 이곳은 다시 드랙만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 작은 드랙 공동체가 인간에 대한 적의를 갖지 않고 있다 한들, 이들이 드랙 종족이나 지구인의 관습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적의 비-실재성에 대한 가능성과 불가능성. 작가는 끝까지 냉정하다. 소유와 다름을 조건으로 하는 전쟁이 현실에서 좀처럼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