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서던 리치(어나힐레이션)>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어나힐레이션(annihilation)’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상태 변화의 사건이다. 이때 소멸은 사라짐이 아니라 이행이다. 영화는 이 개념을 생명, 자아, 관계의 영역에서 탐색한다.
생명
영화 초반, 생물학 교수 리나는 학생들에게 모든 세포는 하나의 세포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약 40억 년 전 하나의 세포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고…… 모든 세포들이 쌍으로 분열하면서 새로운 생명체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모든 생명이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했으며, 각 생명은 ‘동일한 자기 복제’를 통해 유지되고 연속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명시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생명의 또 다른 원리가 있다. 영화는 이 또 다른 원리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 전체에 걸쳐 핵심 모티프로 삼고 있다. 바로 다른 세포의 침입에 의한 ‘동일성 붕괴’ 혹은 ‘변형’의 원리다. 분열이 안정을 지향한다면, 결합은 모험과 변형을 지향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전환점은 분열이 아니라 결합, 즉 서로 다른 생명체가 공생하며 새로운 세포 구조를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영화는 이러한 결합에 의한 동일성 붕괴 혹은 개체의 변형을 ‘굴절’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는 생명의 본질이 원래부터 타자와의 혼합 속에서 구성되어 왔음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하늘에서 해안가 등대로 떨어진 어떤 물체가 만들어 낸 ‘쉬머shimmer’는 이 원리를 시각화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빛과 전파뿐 아니라 DNA마저 굴절된다. 한 세포의 DNA가 개체의 표면에서 굴절되어 다른 세포와 결합하는 것이다(물론 과학적 원리 혹은 자연 현상의 변형이며 극단화이다).
이런 결합에 의한 ‘변형’은 파괴일까, 창조일까? 영화는 이런 이분법을 거부한다. ‘변형’은 생명체의 구조가 해체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는 그 어떤 목적이나 의도도 없다. 소멸에 직면한 벤트레스가 말하듯, 이 현상을 촉발한 ‘그것’은 무엇을 원하기보다 다만 부단히 확산되려 할 뿐이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무한한 이행과 확장.
쉬머에 들어선 순간, 주인공 리나의 몸속에서도 종(種)이 전혀 다른 개체들의 DNA들의 확장이 시작된다.
자아
영화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형성되어 가는 이 낯선 생명체가 보여 주는 행동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물리학에서 어나힐레이션은 입자와 그 반입자(특정 입자와 질량과 스핀이 동일하지만 전하 등 내부 양자수가 반대인 입자)가 충돌하면 질량이 완전히 에너지로 전환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이 똬리를 튼 등대 안에서 리나 아닌 리나가 생겨나는 과정은 이 물리학 원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리나 아닌 리나’는 리나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하지만, 좌우가 뒤집힌 형태로 나타난다. 같은 행위가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 모습은 같지만 반대인 ‘대칭’, 딱 그 모양이다.
리나의 행위를 반대 방향으로 따라 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리나의 외모와 같아지는 ‘리나 아닌 리나’는 리나인가, 리나가 아닌가. 자신과 똑같아진 존재와 손을 맞잡고 마주 선 리나는 이제 고유의 존재인가, 아닌가.
‘자아’에 관한 이 물음은 리나가 우선은 쉬머로 다음에는 등대로 들어가는 선택과 관련 있다.
그녀는 자신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남편이 자살 임무와 다를 바 없는 비밀 임무를 자처하여 쉬머로 들어갔었다는 사실을 리나는 알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로 돌아왔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복합 장기 부전 증상을 보이며 내출혈을 일으키다 코마 상태에 빠진 남편 케인을 병실에 둔 채 리나는 쉬머로 들어간다. 그리고 기어이, 극단적 변형이나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등대로 향한다.
이 결단에는 남편을 되살릴 방법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투쟁심과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자책감이 뒤섞여 있다. 그 마음으로 인해 자신이 어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온몸을 던져 넣는 이 행위에는 자멸과 재생에의 의지가 혼재되어 있다.
케인이 죽음을 선택한 바로 그 자리에서, 케인이 자신을 파괴시킨 백린탄으로, 리나는 백린탄을 이용해 살기를 선택한다. ‘리나 아닌 리나’에게 백린탄을 쥐여주어 그를 파괴시키고 자신은 탈출한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자멸의 욕망을 타자화하여 자멸과 재생을 완수한 셈인가. 그렇다면, 몸 안에 다른 개체들의 DNA를 지닌 채 심리적 자멸과 재상을 완수한 ‘리나’는 대체 어떤 리나인가.
관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문제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케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케인이 아닌 생명체와 리나이지만 몸에서 어떤 이행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서로를 끌어안을 때, 케인 모습인 자와 리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케인의 눈빛은 날카롭고 서늘하면서 알 수 없는 결의가 담겨 있는 한편, 리나의 눈빛은 체념인 듯 기대인 듯 슬픔인 듯 혼란인 듯 도무지 선명하지가 않다.
그들은 이제 어떤 존재인가? 과거와 동일한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과거의 그들에 비추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말하기 어렵다. 이들이 부부로서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인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거나 단절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 모호함은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과학과 초과학을 결합해 사고 실험을 한 <서던 리치>가 도달한 결론인 듯하다. 끊임없이 이행하는 생명의 지금 상태 그리고 개체로서 자아의 연속성과 파열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명확히 ‘알 수 없음’. 이런 존재들이 상호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음’.
생명과 자아가 본질적으로 혼합과 변형의 산물이라면,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서던 리치』가 이 허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개념을 극도로 굴절시킨다.
그 굴절의 끝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지대에 이른다. 그곳에서 소멸과 창조는 구별되지 않고, 그것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생명이 계속된다. 두렵고 섬뜩하지만, 생명들의 무수한 관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