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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17. 2022

세 명의 악인과 돈가방만으로 들춰낸 미국 근대사의 이면

<석양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6) 리뷰

석양의 무법자 (1966)

연출: 세르지오 레오네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 반 클리프, 엘리 웰라치 외

별점: Not Rated

(1970년 이전 영화는 별점을 매기지 않습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미국, 블론디(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멕시칸 총잡이 투코(엘리 월라치)와 함께 동업 중이다. 블론디는 현상범 투코를 잡아 현상금을 받고, 투코가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 구해주는 역할. 한편 엔젤 아이즈(리 반 클리프)라 불리우는 범죄자는 엄청난 돈이 묻힌 비밀장소를 추적 중이다. 그러나 마침 투코와 실랑이를 벌이던 블론디는 돈이 묻힌 장소를 죽어가는 사람에게 듣게 되고, 결국 둘은 돈을 찾아 나서는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통 서부극의 팬들에게는 아니꼬운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이 불후의 스파게티 웨스턴 걸작은 단순히 이탈리아 서부극을 넘어 미국 본토에서 제작되던 이른바 정통 서부극을 포함하더라도 최고의 웨스턴 무비 중 한 편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대개 권선징악적 주제의 정통 서부극과 달리 등장인물 모두가 일정 부분 악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특징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양산형으로 제작되던 수많은 당대 이탈리아 서부극이 플롯이랄 것조차 없이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화려한 액션과 무자비한 살인 시퀀스에만 할애했던 것과 달리, <석양의 무법자>는 같은 골자의 액션 시퀀스를 지켜내면서도 거기에 캐릭터의 입체적인 측면을 더해 그 많은 악한 자들 속에서도 그나마 덜 악한 자를 응원하게 하는 절묘한 연출을 보여준다. 따져보자면 시네마에 있어 피카레스크물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리뷰에서 우리는 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을 뜯어보며 영화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고 영화가 오늘날의 21세기 영화에 미친 영향을 가볍게나마 훑어보도록 하자.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

이 영화에 대해 국내 관객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오해가 바로 제목에 관한 것일 테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라는 원제를 가진 본 작은 직역하자면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이라는 제목이 된다. 이 제목을 그대로 오마주하여 김지운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만주 웨스턴 무비를 만들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이 번역이 합당한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캐릭터 소개가 끝나는 약 20여분만을 보더라도 이 번역대로라면 뭔가 이상함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세 주인공이 본인들의 소개가 끝날 때까지 죽인 사람의 수를 세 보자. '못생긴 놈' 투코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나쁜 놈' 엔젤 아이즈가 세 명을 죽이는 동안 '좋은 놈' 블론디는 단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나쁜 놈'보다 많은 사람을 죽인다. 따져보자면 그들을 죽어 마땅한 악인이라 보기에도 애매하고 말이다. 좋은 놈이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사실 원제를 너무도 직역한 탓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사실 영화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외피를 쓰고 있는 한 세 주인공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쨌거나 '악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악인이냐는 점에 맞춰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이라는 뜻과는 달리 Good에는 능력있는, 뛰어난 등과 같은 수많은 뜻이 존재한다. Ugly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단순히 얼굴이나 외형이 못생김을 넘어 행동거지가 추하거나 꼴불견이다와 같은 경우에도 충분히 쓰일 수 있는 단어이다. 즉, 세 사람은 모두 같은 악인들이되 그 특성에 있어 Good, Bad, Ugly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뿐이다. EBS에서 제작한 자막에는 이들의 설명을 각각 '영악한 놈', '사악한 놈', '추악한 놈'이라고 붙인 바 있는데, 아무래도 이 번역이 가장 한국어로 잘 의역된 번역이 아닐까 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블론디와 엔젤 아이즈, 투코의 행동들이 보다 감정적으로 와닿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영화는 돈가방을 눈앞에 두고 영악하고 유능하게 행동하는 악인, 사악하고 자비없이 행동하는 악인, 추악하고 꼴불견으로 행동하는 악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오히려 미국에서 제작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남북전쟁 묘사

이번에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남북전쟁시기 미국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스파게티 웨스턴이 오히려 정통 웨스턴보다도 많이 수입되고 크게 흥행한 국내에서는 잘 모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북전쟁과 같은 미국 정치사의 문제는 미국 본토 서부극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주제였다. 그 이유에는 정통 서부극이 이후 수퍼히어로 무비로 이어지는 권선징악이라는 큰 주제 하에서 다뤄졌던 탓도 있지만 자국의 치부에 대한 묘사를 적나라하게 하기를 꺼리는 미국인들의 심리가 보다 큰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자본에 의해 제작되고 본토가 마피아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겪고 있었으며 미국을 어떻게 묘사하든 크게 신경쓰일 것도 없었던 스파게티 웨스턴의 경우에는 달랐다. 이들은 극의 폭력성과 말초적 재미를 위해 다소 과장되기는 했을지언정 미국의 문제들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석양의 무법자>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노예제를 옹호하던 남부군이 "신은 우리 편"이라며 노래하는 아이러니를, 포로를 잡아놓고 폭행하고 약탈하는 북부군의 아이러니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시체로 쌓인 황야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의미한 소요전을 벌이는 전쟁의 허망함 역시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드러낸다. 이런 묘사는 오히려 정통 서부극보다도 사실적이었기에 관객들이 그 폭력성을 목도하고도 눈살을 찌푸리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할 정도로도 여겨졌을 것이다.

돈, 돈, 돈!

다시 영화 속 줄거리로 돌아가보자. 블론디와 엔젤 아이즈, 투코가 편이었다가 적이 되며 적이었다가 다시 편이 되는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20만 달러의 돈. 영화 속 인물들은 (앞서 언급한 그들을 설명하는 수식어처럼)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돈을 갖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악인들이다. 이런 레오네의 피카레스크적 시각은 당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앞 문단에서 설명한 남북전쟁의 실체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레오네에게 있어 남북전쟁은 노예해방과 인권의 문제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어떠한 신념이나 이념보다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라는 관점에서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졌기에 싸울 뿐이다. 그런 미국사의 어두운 이면이 지금 돈가방을 놓고 싸우는 세 사람의 모습과 겹쳐 보이지 않는가? 결말부 세 사람의 최후의 결투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서로 땅을 파거나 파게 하는 쪽, 혹은 두 사람 모두를 농락하고 돈가방을 들고 도망치려는 쪽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는데 이는 어찌 보면 자본가(블론디, 땅을 파게 하는 자)와 노동자(투코, 땅을 파는 자),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범죄자(엔젤 아이즈, 갈취하려는 자)라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닮았다. 이처럼 예리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스파게티 웨스턴에 미국 자본주의의 속성이 더해지자 나온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피카레스크 시네마의 탄생이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까지

다음으로 살펴 볼 대목은 본 작이 이후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영화들에 미친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몽타주 기법을 활용한 현란한 연출과 시가를 피우며 멋드러지게 등장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타일, 후반부 묘지에서 삼인방이 벌이는 총격 시퀀스를 비롯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이후의 영화들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필자가 영화를 보며 대표적으로 생각났던 지점들을 몇 군데 살펴보도록 하자.

첫번째로 생각나는 장면은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 속 한 솔로의 등장 장면이었다. 솔로는 첫 등장에서 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외계인을 테이블 아래 몰래 감춘 권총으로 쏘는데, 이는 엔젤 아이즈가 첫 등장에서 방문한 집주인을 살해하는 방식, 혹은 투코가 욕조에서 자신을 습격한 초반부의 팔을 잃은 사내를 살해하는 장면을 그대로 오마주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스타워즈를 위시한 스페이스 오페라, SF 장르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수퍼히어로 무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수많은 효시가 웨스턴이라는 장르에서 비롯됨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대목이다.

시간대를 많이 현대로 가져와보자. 오늘날 영화계의 최고 거장 중 한 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비단 레오네의 영화 뿐만 아니라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 자체를 자주 오마주해온 감독 중 하나다. 대표적인 영화가 <헤이트풀 8>이다. 투코가 블론디를 이끌고 사막을 걷게 하는 장면은 해당 영화 속 마커스 워렌이 채스터 찰스 스미더스를 붙잡아 알몸으로 설원을 거닐게 하는 장면으로 그대로 오마주된다. 또한 미국사의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미국인으로서 주제의식은 다를지언정 <헤이트풀 8>이 그리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성 역시 본 작과 유사하다. 그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8인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난 악인들이며 입체적인 면을 조금씩 가지고 있지 않나.

타란티노가 연출한 또 한 편의 웨스턴 무비인 <장고: 분노의 추적자> 역시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제와 인종주의와 같은 미국 근대사의 이면을 꼬집고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는다는 점이 그렇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비록 부족한 제작비의 탓이기는 했으나 제작 과정에서 당대 전통 웨스턴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히스패닉의 비중이 늘어나고 원주민 차별 등의 이슈를 다루는 등 오히려 미국 사회를 전통 웨스턴보다도 예리하게 묘사한다는 평가를 받고는 했다. 하물며 그 중 최고작이라 불리는 <석양의 무법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처럼 전통 웨스턴이 꼬집지 못하던 백인 중심 미국사의 문제를 스파게티 웨스턴은 신랄하게 꼬집어냈고, 그런 애티튜드는 이후 본격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서부극의 서사를 재전유한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자세한 논증이 궁금하다면 필자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 리뷰를 보시기를 권한다.)

이외에도 서부극이라는 장르 아래에서 이 영화가 영화사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고, 본 작이 국내 영화에 끼친 영향을 짧게나마 논해보도록 하자. 대표적으로 꼽고 싶은 것이 박찬욱이 영화세계에서 '복수'를 다뤄 온 방식에 관한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으로 대표되는 그의 복수 3부작은 사실 <석양의 무법자> 속 세계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절대적 옳고 그름이란 없는 세계 속에서 모두가 서로를 이용하려 들며 행운과 불운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박찬욱의 비관론은 돈가방을 손에 쥔 자가 그것을 기꺼이 나누려 드는 '영약한' 블론디이기를 바라야만 하는 영화 속 세계관을 닮아있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장르에 대한 항변

마지막으로 본 작이 제작되던 당대 사회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받아온 오명에 대해 항변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도록 하자. 비록 오늘날은 그 중 많은 작품들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받았으나 이탈리아에서 제작되는 서부극에 대해 당시 미국 영화계가 보인 반응은 싸늘했다. 존 포드와 버트 케네디는 인터뷰 중 스파게티 웨스턴에 대해 나눈 대화에서 그것을 "이야기와 사건은 없고 살인만이 난무하는" 재앙 취급했으며 그런 반응들에 대해  본 작의 감독인 레오네는 "포드는 아일랜드인, 진네만은 오스트리아인, 랑은 독일인, 와일러와 트루뇌르는 프랑스인인데 왜 이탈리아인만 서부극을 만들 수 없는가" 하는 맥락으로 항변한 바 있다. 그런 맥락의 항변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듯이 오늘날 수많은 스파게티 웨스턴 걸작들이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재평가받았지 않았나.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글을 끝맺고 싶다. 조금 느릴지언정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영화사에 있어 마스터피스로 남을 작품이 받을 평가는 단 둘 뿐이다. 걸작과 저주받은 걸작. 글의 첫머리에 했던 말을 다시 꺼내야겠다. 정통 서부극의 팬들에게는 아니꼬운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이 불후의 스파게티 웨스턴 걸작은 단순히 이탈리아 서부극을 넘어 미국 본토에서 제작되던 이른바 정통 서부극을 포함하더라도 최고의 웨스턴 무비 중 한 편일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는 서부극을 제작할 수 없다던 본토 미국인들의 생각은 틀렸다. 그런 말을 일삼던 이들의 주장처럼 이탈리아 자본이 웨스턴 무비 시장에서 발을 뗐다면 우리는 이토록 훌륭한 서부영화계의 걸작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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