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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Dec 16. 2022

공상과학은 현실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

<A.I>, 스티븐 스필버그 (2001)

A.I. (2001)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할리 조엘 오스먼트, 프란시스 오코너, 주드  

별점: 4.5/5

극지방의 해빙으로 인해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지구 상의 모든 천연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어느  미래. 인류의 과학문명은 천문학적인 속도로 발전하여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집안일, 정원 가꾸기에서부터 오락 기능을 수행할  있는 로봇까지. 로봇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궂은일을 대신하게 된다. 어느 , 하비 박사는 로봇공학 발전의 마지막 관문이자,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는 '감정이 있는 로봇'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는 로봇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사에서 감정을 지닌 최초의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탄생시킨다. 데이비드는 사이버트로닉스사의 직원인 헨리 스윈튼과 모니카의 집에 실험 케이스로 입양된다. 스윈튼 부부의 친아들 마틴은 불치병에 걸려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냉동되어 있는 상태.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데이비드는 모니카를 엄마로 여기며 점차 인간사회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아들 역할도 잠시, 마틴이 퇴원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자 데이비드는 슈퍼 토이 테디 베어와 함께  속에 버려지는데...


동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데이빗의 대사이기도   격언은  위대한 공상과학 걸작을 이해하는  필수적이라고도   있을 만큼 중요한 문장이다. 작중 인간이 되고 싶은 로봇 데이빗이 피노키오의 꿈을 꾸듯이 우리들 역시 우리의 소망이나 윤리, 철학 등을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장르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고는 한다. 사실 메타포라는  원래  그렇지 않았던가. 우리가 이번에 살펴볼 영화, <A.I.> 그중에서도 사랑에 관한 스필버그의 고찰을 담은 훌륭한 공상과학 영화다.

영화는 크게  갈래의 이야기로 갈라진다. 첫째, 에이아이는 사랑할  있는가에 대하여 하비와 과학자들 간의 논쟁이 오가는 프롤로그. 둘째, 어머니를 사랑하게  로봇 데이빗과 어머니 모니카의 삶을 그린 1. 셋째, 모니카에게 버려진 데이빗이 로봇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인간이 되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 2. 마지막으로  미래 외계인들을 통해 잠시나마 데이빗의 꿈이 실현되는 에필로그.   개의 파트들은 치밀하면서도 각각의 부분들이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성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논해보도록 하자.

영화는 프롤로그를 통해 주제의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  그것에 대한 공상과학적 청사진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질문은 ‘누군가의 사랑에 대한 책임이다. 과학자들은 제각기 모여 로봇도 영혼을 가질  있는가, 로봇도 사랑을   있는가, 과연 로봇이 인간을 사랑할  있는가에 대해 논한다. 그러던   과학자는 하비에게 묻는다. “만약 로봇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인간 또한 로봇을 사랑하리라는 법이 있을까요?”  질문에 하비는 “신도 자신을 사랑해줄 대상이 필요해 인간을 만드셨죠 답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하며, 사실 이는 굳이 책임질 필요 없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책임 대한 질문은 러닝타임 내내 이야기되며 관객들의 뇌리에 맴돌게 된다. 작중에서는 로봇의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예시로 제시되지만 사실 이는 반려동물, 장난감, 환경  많은 부분에 적용이 가능한 윤리적 문제이다. 그야말로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현실의 반영이 되어 현실의 가치에 대해 논하게 되는 대목이다.

짧은 프롤로그가 지나고 우리에게 책임에 관한 질문이 맴돌기 시작할 때쯤 1부가 시작된다.  1부는 스필버그식 감성의 내러티브를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빗은 명령어에 따라 모니카를 영원히 사랑하게 되고 그런 데이빗을 모니카 역시 아끼지만  사람의 모자 관계는 모니카의 진짜 아들인 마틴이 극적으로 소생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데이빗은 마틴의 또래 소년들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때로 마틴을 질투하기도 하며, 고통에 아파하고 두려워하는  여타 인간 소년들과 다를  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마틴의 소생 이후 데이빗을 좋게 보지 않던 남편 헨리의 눈엣가시가  데이빗은 끝내 애완 곰인형 테디와 함께  속에 버려지게 된다.

 1부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데이빗이 보인 행동들이 그가 인간이었다면 유아기에 벌어진 사고쯤으로 쉽게 넘어갔을만한 일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진짜 아들마틴 역시 자꾸만 데이빗을 자극하고 못살게 굴지 않았던가. 결국 데이빗을  속으로 유기시킬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그가 인간이 아니며 그에게는 영혼이 없으리라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데이빗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그렇게 버림받는다.

여하튼 테디와  둘이 숲에 남은 데이빗이 이런저런 수난을 겪고 조력자인 남성 애인대행 로봇 조를 만나 피노키오 이야기  파란 요정을 찾아 인간이 되려는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2부는 시작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1부가 스필버그식 내러티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면 2부는 스필버그식 스타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봇 축제의 기괴한 비쥬얼과 개체 조절을 위해 버려진 로봇들을 학살하는 인간들의 무자비함, 붉은 도시의 화려한 빛깔, 닥터 노우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 근미래 배경에 걸맞은 각종 볼거리를 자랑하는 이동수단, 마지막으로 물에 잠겨버린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까지.  2부의 스타일은 2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하기 이루 말할  없는 것들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한 비쥬얼 뒤로 슬며시 보이는 음울한 분위기, 그리고 1부와 확연히 달라진 비관적 시선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번째 파트에 진정 빠져들게 하는  번째 요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비인간을 착취하는 인간의 폭력성이 절정으로 드러나는 로봇축제에서의 시퀀스는 물론이고 로봇 매춘이 횡행하고 범죄를 저지른  로봇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의 감정은 점점 메말라가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붉은 도시의 풍경, 그리고 물에 잠겨버린 맨해튼의 전경을 보다 보면 우리는  자체만으로도 드러나는 음울함에 몸서리치게  정도다. 특히나 작중 시점에서 물에 잠긴 것으로 설정된 맨해튼이라는 공간은 일순 맨해튼 프로젝트를 연상시켜 인류의 현실에 대한 성찰마저 요청한다.

파란 요정을 만나려는 데이빗의 모험은 맨해튼에서 그의 개발자 하비 박사를 만나고 모든 것이 꿈이나 목표를 좇는 열정과 같은 데이빗의 감정이 어디까지 발현될  있는가를 테스트해본 것이었다는 비극으로 끝맺어진다. 자신이 세계에서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언제나 여겨왔던 데이빗은 자신이 사실 박사의 시제품에 불과했으며 언제든 대량 생산되고 폐기될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좌절한다. 그는 바다로 투신을 택하지만 조의 구출로 목숨을 건지고, 바닷속 깊은 곳에서 파란 요정의 형상을 보고 잠수정을   그곳으로 향한다. 오래된 테마파크의 피노키오 테마존에 우두커니 서있는 요정의 모습을  그는 수천, 수만 번이고 그를 향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동화는 현실이   없고, 요정 장식물은 그의 소원을 들어줄  없다. 그럼에도 데이빗은 멈추지 않는다. 잠수정의 불이 꺼지고 그의 배터리도 다할 때까지. 영원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파란 요정을 향해서 말이다.

이 2부까지의 내용으로 영화가 한 편의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관객들 가운데에는 2천 년 뒤 외계인들에 의해 데이빗이 비로소 구원받는다는 결말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부 이후 2천 년 뒤의 시점에서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그야말로 시네마가 해낼 수 있는 모든 성취를 이뤄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에 있어 꼭 필요한 장면이다. 말하자면 프롤로그가 ‘사랑 받음에 대한 책임’이라는 질문을 건넸다면 에필로그는 이 질문에 오직 시네마만이 건넬 수 있는 답변을 담았다.

2 년의 세월이 흐른  지구를 조사하던 외계인들에 의해 발견된 데이빗과 테디는 그들의 기억을 공유한 외계인들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데이빗은 당연히 어머니 모니카를 세계에 다시 구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외계인들의 기술력으로도   살려낸 인간은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기에 데이빗의 모니카와의 재회는 길어야 하루밖에 가지 못한다. 데이빗은 수긍하고, 마침내 그리도 찾던 어머니를 만나 다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둘이서, 마치 인간이  것만 같은 하루를 보낸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니?" 깨어난 모니카의 물음에 데이빗은 "그냥... '오늘'이에요." 하고 답한다. 내일이 와도 결국 오늘이 되는 모든 시간들처럼, 데이빗에게  하루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니카가 잠든 , 데이빗은  이상 깨어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장면이 굳이 영화 속에 삽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사실 그토록 많은 고생을 해온, 무수한 사랑에 대한 배반과 무책임을 겪어온 데이빗에게 스필버그가 내주는 선물과도 같다. 오직 시네마만이 데이빗에게 내줄  있는 '책임'이자  책임감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극의 안정성과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였더라면  장면은 어쩌면 빠지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작품의 완성도를 따지기보다는 당장 자신의 눈앞에서 살아  쉬는 데이빗에게 기적과도 같은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때문에 <A.I.>  무엇보다도 시네마적인 SF 걸작이  것이다.

공상과학은 현실의 가치를 지킬  있는가. 필자는 그것이 시네마인  절대적으로 '그렇다' 답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도 논하게  수많은 영화들처럼, 시네마는 기적을 선사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기적은 비록 현실에서 이루어질  없는 것일지언정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년이 넘는 세월 끝에 비로소 구원을 찾은 데이빗처럼, 시네마의 세계 속에서 우리 모두의 가치는 지켜질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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