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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Jan 16. 2023

메시아를 위한 세카이계는 없다

<문신을 한 신부님>과 <날씨의 아이>를 경유하여 <밀양>으로 향하자

"그냥 전 세계의 채무를 전부 한 사람한테 몰빵한 뒤에 걔를 죽여 버리자"
"아무래도 당신이 방금 그리스도교를 발명한 것 같아요."




  20년대 이후 서구 온라인 커뮤니티가 생산(?)한 최고의 농담 중 하나는 이 트위터 타래라고 생각한다. 부채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리스도교적 대속 개념을 한데 엮어 풍자하는 이 짧은 타래는 딱 그것이 블랙유머적인 만큼 불경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지닌 경건한 이미지를 잘 이해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두 마디의 (비의도적인) 농담이 세속과 신성을 동시에 비판하는 아주 잘 만들어진 코미디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그렇다면 내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하는 코미디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뭘까? 추측하건대 이런 질문뿐일 테다. "메시아에게도 도피할만한 세카이계가 있을까요?"


  쉴만한 물가로 나를 이끄는 목자인 야훼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를 의로운 길로 이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이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스러져간 한 남자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음에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메시아. 거룩한 공교회에 함께하시며 그의 피와 살을 신령한 양식으로 우리에게 먹이시어 영생을 주시는 분. 사도신경과 기도서의 영성체 기도를 읽을 때면 묘한 경건함을 느끼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경스럽게도 고백하자면, 나는 이 대속에 관한 신성한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세카이계에 관하여 떠올렸다. 버블 시기 일본 서브컬쳐에서 유래한 그 세카이계를 말하는 것이 맞다.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한 세계이자 도피처 말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의문이 들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전능한 주의 대속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고독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이끄시고 나면 그분은 어디서 쉬시지?’ 이런 생각은 좋게 해석해도 오지랖이었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교만이었다. 전능하신 분의 권위를 그대로 부정한 거라고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그를 위해 의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진 십자가를 함께 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결국 애초부터 내가 져야 할 짐이기도 했으니까.


  얀 코마사의 <문신을 한 신부님>은 신성과 세속이 뒤섞인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논하면서 문신 가득한 ‘가짜 신부’ 다니엘의 몸을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에 비유한다. 그런 발칙하고 불경한 메타포를 통해서 영화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두를 구원한다는 발상이 지닌 폭력성에 대해 질문한다. 보이지 않는 심각한 갈등을 겪던 마을은 다니엘의 가짜 신부 행세 덕에 문제를 해결하지만 반대로 그런 사역을 행한 다니엘은 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진 채 끝없는 죄의 굴레로 빠져들고 만다. 그 영화를 처음 보던 극장에서, 불타는 소년원을 뒤에 두고 타락한 다니엘을 보며 나는 묘하게 서글퍼졌다. 그건 분명 나의 주, 그리스도를 향한 감정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실 수 있나요. 어떻게 당신을 걱정하고 도우려는 마음가짐조차 교만이라며 모든 편해짐을 거부하실 수 있나요. 그래봐야 별 볼일 없는 한 명의 인간인 내가 그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다른 것보다도 이 엉뚱한 지점이 그리도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전능한 그의 앞에 의지하려 할 때 홀로 그 전능함이 가져올지도 모를 외로움에 대해 질문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내가 아니겠지만, 내게 그런 부담이 주어진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이 글에서 나의 첫 질문이었다. 메시아를 위한 세카이계는 있을까? 모든 걸 내팽개치고 몸을 숨길만한 지극히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도피처 말이다. 나의 세계만이 곧 우주가 되는 그 철없고 가녀린 잠깐의 도피는 비록 80년대 일본이 낳은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관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런 퇴행조차 구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계를 포기하면라도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선택하러 와줄 누군가 혹은 무언가, ‘전부’가 아닌 ‘우리의 전부’만을 챙겨줄 그런 구원 말이다.


  이는 지극히 소아병적인 사고에 불과함을 나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세계를 동치 하는 시도가 그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에 대해서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더더욱 2010년대 말의 세계에도 세카이계는 여전히 유효함을 선언하고자 <날씨의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신카이 마코토와 같은, 뒤늦은 사춘기에 지지를 보내고만 싶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이지 못하다면 구원조차도 의미없다며 대속 대신 차라리 빗물에 잠겨 버린 세계를 택한 호다카와 히나 같은 사춘기 말이다. 멸망하는 세계를 뒤로한 채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며 “우린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그들의 태도는 분명 유아적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 윤리와는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종국에는 지양되어야만 할 태도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 유아적 태도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나는 진정한 ‘의로움’의 가능성을 보았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하는 것은 비록 누군가에게는 윤리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현실이다. ‘내 구원’보다는 ‘세계의 구원’을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찌 보면 또 그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윤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몸을 기대며 맡겨 놓기라도 한 듯이 구원을 찾으려고만 하는 세계에서, 어쩌면 진정 의로운 길이란 떨어질 구원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말조차도 부정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신앙 속에서 ‘믿음’이란 결국 ‘의로워짐(Justification)’과 동의어였으니까.


  이창동의 영화 <밀양>에서 세계에 받은 상처를 단순히 신을 믿고 그에게 의지함으로써 치유하려던 신애에게 돌아온 세계의 화답은 오히려 비겁하고 죄 많은 인간들이 겪는 구원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 인해 오용되는 용서, 그리고 그 끝에 남는 실망감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며 끝없이 성장하는 종찬과 서로의 짐을 조금씩 나눠가짐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짐을 대신 들어줄 이만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나약한 인간이, 끝내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른 나약한 인간과 함께함으로써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내 생각은 우리가 결국 향해야 할 윤리는 지난날 이창동이 발견했듯 <밀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지 않을까 하는 지점까지 미쳤다.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주지는 못할지언정,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정도는 함께 들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메시아를 위한 세카이계는 없다. 나약하고 무른 나와는 달리 그에게는 그런 도피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나약하고 물러 터진 우리에게는 여전히 세카이계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피가 아니라 도피의 끝에서 서로가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세계’로 돌아오는 것임을 믿는다. 주를 세 번이나 부정했으나 결국 주의 품으로 돌아왔던 2천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고의 사도처럼, 중요한 것은 탁월함이 아닌 반성과 성찰일 테니까. 영혼 없는 육체가 죽은 것이듯, 행함이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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