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작은 일로 싸우는 세계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생존 가능한 환경은 무엇인지, 자원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수십 년 뒤를 전제로 한 기술과 조직을 설계한다. 인간이 지구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인류의 시간 스케일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다시 고개를 돌리면, 이 작은 지구 안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회의 한 번, 메시지 한 줄, 역할의 경계 하나를 두고 사람들이 팽팽하게 맞선다. 그 일 자체는 크지 않다. 결과가 세상을 바꾸지도 않고, 대부분은 며칠 지나면 잊힌다. 그럼에도 감정은 과하게 소모되고, 모두가 물러서지 않는다. 그 장면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이 감정은 종종 냉소로 오해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냉소라기보다 인식의 초점이 이동할 때 생기는 이질감에 가깝다. 일의 크기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몰입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다.
우리가 흔히 ‘작은 일’이라고 부르는 갈등의 대부분은, 사실 일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통제권의 문제이고, 인정의 문제이며, 책임과 정체성의 문제다.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누가 존중받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얽히는 순간, 사소한 사안도 쉽게 전투가 된다.
그래서 이상한 불균형이 만들어진다.
사안의 영향 범위는 작은데, 투입되는 감정과 에너지는 과도한 상태. 이 불균형을 인지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그 싸움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라는 질문은 회피의 표현이 아니라, 이미 한 단계 위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신호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한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내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질문은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더 큰 단위의 문제를 다루고 싶다는 기준이 생겼다는 신호일 수 있다.
작은 일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조직과 사회는 여전히 작은 결정들의 연속으로 굴러간다. 문제는 작은 일을 다루는 방식이다. 기준이 없고, 맥락이 공유되지 않으며, 책임 구조가 불명확한 환경에서는 작은 결정 하나하나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때 느끼는 피로감이 바로 이 이질감이다.
결국 선택지는 세 가지로 수렴한다.
모든 사안에 같은 밀도로 반응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사소한 쟁점을 목적과 원칙의 문제로 끌어올려 판을 바꾸거나, 혹은 계속해서 사소한 일로 소모전을 반복하는 환경 자체를 재고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이 감정은 세상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자신이 에너지를 써야 할 스케일이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다.
사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문제를 다루며 살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 작은 문제에 전부를 걸고 싶지 않게 되는 때가 온다. 누군가는 화성을 바라보는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보다 한 단계 큰 질문을 찾기 시작한다. 그 감각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이동하기 직전의 징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