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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Dec 28. 2023

산책 예찬

우아한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싶어요.” 학생이 대답했다.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나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학입시 면접 준비를 하면서 합격하고 나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질문을 던졌다. 학생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학원도 학교도 아닌 곳으로 발걸음 닿는 대로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다니다가 배고프면 혼자 돈까스도 사 먹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 간절함이 그대로 투명하게 전해졌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느라 숨이 차도록 헐레벌떡 달리는 대신 거리의 모습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 같은 것들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걷고 싶다는 학생의 소박한 바람이 굳이 입시가 끝나야만 가능한 일인지 잠시 안타까웠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함께 달달한 라떼 한 잔씩 들고 학원 옆 골목길을 산책하자고 꼬드기고 싶었다.

열 살 정도 되었을 때였다. 저녁 5시쯤이면 이모에게 시장을 가자고 조르곤 했었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항상 바빴던 엄마 대신 함께 살던 이모와 팔짱을 끼고 넉넉하지 않는 시장비를 들고서 그날의 저녁거리를 사러 갔었다. 기껏해야 찜을 해먹을 양배추 한 통이나 경상도에서 주로 먹는 콩잎 같은 푸성귀를 사오는 것이 다였지만 얼추 한 시간 동안 시장이라는 호화찬란한 장소를 구경하면서 운이 좋으면 뜨겁게 갓 튀겨진 어묵 한 입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재미가 참으로 쏠쏠했다. 시장 구경이 아니어도 큰 목적도 없으면서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었는데 대학을 진학하고 울산에서 서울로 왔더니 나의 ‘쏘다니기’를 말쑥한 서울 친구들은 ‘산책’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표현했었다. 역시 서울 애들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을 오랫동안 운영하면서 세 평짜리 교실 안에서 계절감을 느끼지 못하며 봄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곤 했었다. 선생님 한 명을 더 고용하면 일요일을 쉴 수 있었지만 한 사람의 인건비를 생각하면 쉬운 결정이 아니어서 나는 휴일도 없이 수업을 했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나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삼십 대 후반 어느 날, 목이 불룩하게 앞으로 나온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 저하증이 심하다 못해 호르몬 수치가 거의 0에 가깝다며 일도 쉬어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한다고 의사가 한참을 설교했었다. 사업에 계속 실패했지만 또 사업을 벌이는 남편과 미술 공부를 하고 있는 딸을 생각하면 호르몬이 0라고 해도 일을 쉴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했다.

갑상선 저하증 진단을 받은 후부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 근처에 있던 용마산과 아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학교를 가고 나면 세수도 하지 않고 산을 올랐다. 작은 가방에 500ml 생수 한 병과 손수건을 넣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무작정 산으로 달려갔다. 그 동네를 떠나기 직전까지 나는 오백 번도 더 용마산과 아차산을 올랐었고 갑상선 수치는 완치는 되지 않았지만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나는 날마다 조금씩 나 자신과 친해졌다. 걷고 있는 그 순간마다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가 동행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로워하지 마. 참 용감하구나. 브람스 참 좋지? <윈터스 본>영화 대단해. 저기 동훈이 엄마 오네. 아휴, 만나기 싫은데 저쪽으로 피해서 걸어야지. 매일 올라와도 매일 힘들구나. 적금 타면 대출금 다 갚아야지’ 라며 아침 산책을 통해 나는 나 자신과 끝없이 대화하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흉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시원하게 흉도 보았다.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고독감과 세상을 향한 억울한 감정에서도 상당히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서달산 아래에 살며 매일 나 자신과 어깨동무한 채 산을 오르거나 강변을 산책한다.  ​

내 앞에 앉아있던 자유를 꿈꾸는 학생에게 지금이라도 동네 한 바퀴 돌자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학부모님 항의가 들어올까 봐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대신에 마음껏 돌아다닐 그날을 상상하며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으라고 아이스크림 쿠폰을 보내주었다. 산책의 묘미를 일찌기 알아버린 학생이 부럽기도 했다.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지만 꽃과 나무등을 본능적으로 그려낸 프랑스의 화가 세라핀 루이의 일생을 그린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세라핀은 슬플 때 작은 숲을 걷고 나무를 만지고 새, 꽃, 벌레들에게 말을 걸면 슬픔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나는 이 대사를 듣고 완벽히 공감했다. 고스란히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벌레를 무서워하니까 벌레와는 우정을 나누지 못했지만 나무를 자연스레 쓰다듬을 줄 알고 바람의 인사를 듣는 법을 배웠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는 윤슬을 빛내며 흐르는 강에게 나의 슬픔을 부려놓기도 한다. 나도 이제 ‘산책한다’라는 표현을 쓸 줄 아는 우아한 사람이 되었다.



세라핀 루이 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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