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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전일생 Jan 01. 2023

만년필처럼 채우고 또 채워지길.

디지로그 세대의 선물, 만년필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응. 그냥 오빠가 뭘 줘도 좋을 거 같은데?!


“아.. 그럼 예쁜 쓰레기가 필요하겠구만”



한동안 수집했다던 잉크와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늘어놓는다 했다. 만년필을 선물한다는 것의 의미부터 어떻게 잉크를 수집하게 되었는지도.


내색하진 않지만 그저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좋아하는 나에게 크리스마스니까 카드나 편지를 멋들어지게 써주고 싶은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짜잔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리미티드 잉크와 만년필.

투명하고 반짝이는 만년필과 그저 적색인 줄 알았는데 금빛펄이 가득한 잉크.

병을 흔드니 적색잉크와 섞여 들어가는 펄이 마치 명품브랜드 향수 광고가 생각 나는 비주얼이었다.



세트 외에 연습용 펜을 쥐어주고 수집한 여러 가지 잉크를 늘어놓는다.

유명인의 이름과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 박스가 여럿 있었고 굉장히 레트로한 잉크병도 있었다.

하나하나 찍어서 써보고 잉크병 입구에 종이를 찍어 색을 확인시켜 줬다.



내가 좋아하는 녹색과 엄청 오묘한 우주와 같은 느낌의 그레이색. 그레이색은 박스에 실제로 우주가 그려져 있고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인슈타인과 딱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녹색잉크는 펜에 한껏 담아주며 시범을 보여주고, 그레이색 잉크는 병째 주며 잉크를 담는 방법을 알려줬다.


잉크를 채우고, 펜 촉이 마르지 않게 잊지 않고 써주고, 또 비우고 나면 다시 채우는 번거로운 일이 필요하지만 생각보다 만년필은 매력 있고 멋졌다. 그처럼-


남들은 관심 없을 수도 있는 만년필.

만년필은커녕 볼펜도 잘 안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지금,

만년필은 어찌 보면 확고한 취향 같기도 하고

디지로그 세대인 나와 잘 어울리기도 하다 싶다.



집에 와서는 금빛펄의 잉크를 채워 넣었다.

가르쳐준 대로 채웠는데 반도 차지 않는다.

물론 그가 채워준 잉크도 2/3가 넘지 않았으니

원래 가득하게 채우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오히려 부족함 없이 꽉 채워진 것보다는

약간의 공간이 있고, 무언가를 더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장거리인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무슨 이십 대처럼 연애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각자의 생활을 유지하는 주중의 시간이 강제로 주어진 게 오히려 득이라는.

그렇게  텀을 두고 만나니 더 반갑고 애틋한 감정이 생기기도 하니까.



서른아홉에 연애상담을 하고 있을 줄이야라고 말한 친구의 말이 생각나면서

내가 서른아홉에 이런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송년회 하자며 만난 동창은

‘그래. 좀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라며 연애소식에 반색을 표했다.


그래, 내 행복이 우선이어야 남들도 챙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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