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찾으며 자아탐색 - 무색무취 인간 탈출기
나는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는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이는 샌드위치야. 뭐 사실 언니한테 별로 눌릴 일 없었고 동생한테 별로 치일 일 없었지만 어쩐지 샌드위치임을 인정해야 조금이라도 더 애잔한 마음이 생기는 자식이 될 것 같아 순순이 샌드위치임을 받아들였다. 이제와 샌드위치를 생각해본다. 위에서 누르는 것도 아래서 치대는 것도 결국 샌드위치 재료인 식빵 아닌가? 그렇다면 언니는 샌드위치 윗 빵, 동생은 샌드위치 아래 빵이네. 우리는 결국 다 한데 모여 샌드위치였다.
샌드위치 딸 셋은 서로 옷을 물려 입고 돌려 입고 바꿔 입고 몰래 입으며 성인이 되었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우리 셋은 똑같은 옷을 색만 다르게 입고 있었다. 엄마의 취향에 맞는 옷을 깔별로 사서 입히셨던 듯하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엄마는 딸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시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같은 디자인 다른 소재 정도였던 것 같다. 딸들의 취향과 성격, 비위를 맞춰가며 옷을 입히기에는, 세 딸의 엄마는 너무 바빴으리라. 조금 커 청소년기에는 대체적으로 언니의 옷을 동경하며 몰래 입었던 기억이 난다. 뭔가 언니 옷을 입으면 나도 또래보다 더 언니 같아 보이는 것 같고 괜히 막 우쭐하고 그랬다.
성인이 되어서 돈이라는 것을 벌기 시작했을 때 옷 욕심이 폭발했다. 멋이라는 것도 같이 폭발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저 욕심만 폭발하여 '어머 이건 사야 해' 싶으면 다 사들였다. 따로 또 같이 사들인 옷들은 각자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해서 도무지 서로 어우러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투머치의 향연. 과외 알바를 하며 번 돈으로 대학 1-2학년 때 사 입은 옷을 입고 찍은 그때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 '안 본 눈 삽니다'를 외치고 싶다.
나는 왜 취향도 없었을까. 여성스러운 프릴 달린 것들을 좋아한다던지 자유로운 힙합 느낌을 선호한다던지 그도 아니면 특정 브랜드 제품을 좋아한다던지 뭐 그런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제는 하늘하늘 블라우스가 예뻤다가 오늘은 또 리바이스 통 청바지가 좋고 내일은 또 집시 느낌 나는 브랜드의 티셔츠를 꼭 사야 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어디 뭐 옷만 그랬나.
화장품은 또 어땠게.
그거 좋더라- 소리 들리면 사들였다. 가성비 좋다는 로드샵 제품을 종류별로 샀다가 팽개치기 일쑤였고 어느 날엔가는 백화점에 가서 비싼 명품 화장품 코너의 립스틱을 사들였으나 입술만 동동 떠다니는 느낌적인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처박아뒀다. 그래 나는 내 피부가 쿨톤인지 웜톤 인지도 몰랐다 뭔가 한 제품을 사면 끝을 보며 쓴 기억이 별로 없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20대의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잘 어울리는지, 어떤 분위기의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의 취향을 깊이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타인의 취향을 가져다 내게 덧대 보기만 했다.
30대가 된 나는 드디어 취향 없는 무색무취 인간을 벗어났다. 지금도 나를 잘 모르겠다 싶은 때가 가끔 있지만 이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어울리는 사람인지 조금 알겠다. 더 이상 타인의 취향을 부러워하거나 탐내지 않는다.
취향의 사전적 의미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다.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안다. 내 취향을 알고 나니 삶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뭔가를 소비하고 난 후 후회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소비로 인한 만족감이 커졌다. 남들 따라 옷을 입거나 점원의 말에 혹해 물건을 산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다만 내 취향을 따를 뿐. 좀 더 복잡하게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미래의 내가 기대가 된다. 나의 취향을 좀 더 고스란히 담은 공간에서 내 취향의 옷을 입고 내 취향의 밥을 먹으며 살아갈 미래의 나. 나란 사람을 취향 저격한 것들을 나누며, 나란 사람을 알아가는 자아탐색 과정을 이번 매거진에 담아보려 한다.
당신의 취향과는 안 맞을 지라도 개취존중을 바라며. 가볍고 쉽게 쓰인 글이 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