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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Jan 27. 2024

절망의 끝은 시작이다

새해 새 마음, 파리에서 오랜만에 생존신고 

작년 여름 마지막 인턴이 끝나고 출국 하루 전에 극적으로 비행기표를 구해 한국을 다녀왔다. 푹 쉬고 프랑스에 돌아온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구직을 시작하며 이런저런 풍파를 많이 겪었다. 기다리던 자리가 난 적도 있고, 몇 번의 면접을 보기도 했다. 이번에야 말로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또 연락이 오지 않았고, 이 정도면 그냥 프랑스에 취업하지 말라는 신의 뜻 아닐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렇게 피 말리는 하루하루 속에서 대책 없이 연말이 오고 있었다.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프랑스인지 한국인지 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에 고민만 더해갔다. 연말에는 한국을 가지 말아야겠다고, 지금 가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다. 스트레스는 이상한 방식으로 터졌다. 평범한 주말, 한-불 콘퍼런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씻고 자려고 누웠는데 뜬금없이 치통이 시작됐다. 주말 이틀 내내 잠을 설칠 정도로 평생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월요일에 바로 집 근처 치과를 다녀와 지나치게 비싼 치료 견적을 받고 고민 끝에 한국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고작 세 달만의 귀국이었다. 



그렇게 12월을 한국에서 지냈다. 도착한 순간부터 여지없이 마음이 편했고 프랑스에서 달고 살던 크고 작은 병들은 마법 같이 사라졌다. 공항에서 가족들과 인사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기 싫은 마음이 가득했다. 유난히 힘들었던 14시간의 비행 동안 감기에 걸려 냉기로 가득한 파리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더더욱 떠나온 한국 집이 그리웠다.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한국의 싫었던 점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한국의 좋은 점을 알게 됐다. 5년의 시간이 지나 비로소 내가 떠나온 곳과 화해를 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어디 사는지, 그것이 파리인지 서울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내 방식으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산다고 해도 그건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모습의 내가 아니라 파리에서의 나의 모습도 섞인, 전과는 다른 새로운 나라는 것도. 그러니까 지난 5년의 세월은 의미 없는 게 아니… 지만.



그럼에도 프랑스에, 혹은 유럽에 아직 더 있고 싶다. 


사실은 1월 중순에 본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정말 프랑스에서 일을 찾게 될까? 아득했다. 다시 0에서 시작해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터널을 거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터널의 끝이 아직도 멀리 있다니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전 몇 달 동안 느꼈던 절망에 비하면 그 충격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 훌훌 털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됐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해외에서 취업을 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에 가도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 수 있다. 그걸 이제 안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이 안정적인 삶에 대한 유혹이 예전보다 훨씬 커진 것도 맞다. 그렇지만 내가 벌인 일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PS. 제발 밥) 끝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포기하고 타협하는 건 원래도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냥 해외생활 자체도 더 해보고 싶다. 해외에 혼자 살면 외롭고 벅찬 순간들이 많지만 그래도 온전히 내 삶을 꾸려나가는 어른이 될 수 있으니까. 놀랍게도 아직 뻔한 삶은 재미가 없어 보이고 프랑스에서 여전히 이뤄내고 싶은 것도 많다. 충분히 멀리 가보고 싶어. 



만약 프랑스랑 한국에서 동시에 일을 구한다면 결국 내가 프랑스에 남는 선택을 할 것 같은 것도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이곳도 내 집이자 나의 일부가 되었고 프랑스에 있으면 어떤 사회적 압박이나 남들과의 비교, 남들의 시선 등에서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언젠간 미치게 돌아가고 싶어 질) 고국을 두고 더 큰 세상에서 부딪혀 보는 것은 꽤나 값진 경험이다. 그럼 결국 한국을 가는 건 프랑스에서 안 될 것 같으니까(혹은 안 됐으니까) 차선책으로 내린 결정이 될 텐데 어차피 그럴 거면 비자가 남은 한은 여기서 끝까지 열심히 해보는 게 맞다는 결론. 긴긴 방황 끝에 마음을 잡고 나니 한결 홀가분하다. 이제 방향은 알겠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아보자. 


새해를 맞아 새롭게 다짐한 게 있다면 무엇보다 너무 미래만 생각하고 초조해하거나 좌절하지 말자는 것이다. 매일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러니 면접에 붙고 떨어지는 것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이제 며칠 뒤면 프랑스에 산지도 6년 차에 접어든다. 한 손가락으로 못 셀만큼 오래 살아온 내게도 조만간 그럴듯한 보상이 찾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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