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sum Dec 26. 2023

느리게 배우는 아이

평소보다 기온이 갑작스레 뚝 떨어진 날 아침. 


딸래미는 추울 것 같다고 알아서 잘 껴입고 등교했다. 


아들래미는 ....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어제 입던 옷 오늘 그대로 다시 입는 게 다인지라 

패딩을 꺼내주면서 밖이 많이 추우니 꼭 입고 나가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다(고 생각했다). 


잠시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 나가보니 아들은 이미 등교했고 아까 꺼내준 패딩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자리에 그대로 ... 


뭐 늘 있었던 일인지라 자연스럽게 "이노무 자식"이 튀어나온다.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언제 들어도 익숙한 전설의 그 가사로 이어진다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날씨가 추워도 옷 챙겨입고 다닐 줄도 모르고 

더워도 누가 옷을 벗으라고 해야 그제야 벗고 

숙제도 해놓고 맨날 까먹고 그냥 가고 

안내장 같은 것도 사인해주면 뭘하나 책상위에 버젓이 두고 가는데

어떤 때는 가방안에 있는데도 못찾아서 다시 가져오고  


이 가사는 이제 클라이막스 후렴구로 이어진다 


너 커서 뭐 될라고 이러니 

커서 뭐 될래?  


정신없이 전설의 랩을 내뱉다가 얼른 정신을 차린다.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분명 다 들어야했을텐데 학교에 계셔서 다행이다 아휴~ 


이 전설의 랩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10년 넘게 읊어보아도 효과가 제로라는 것이 레전드다. 효과 없음에 눈을 뜨고 이제 더 이상 이 랩을 아들 앞에서 읊지 않게 된 내가 참 대견하다. 그래도 가끔 정신 안차리면 내 입에서 어느 새 아들을 세상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어버리는 후지디 후진 막장 가사들이 흘러나오곤 하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 아들이 그러는 건 타고난 천성도 한몫 하겠지만 환경탓도 크다. 


아이가 문제있어 보이는 행동을 할 때 

사실 아이자체가 잘못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어른들이 아이의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온 탓이 크다. 


추워도 옷을 챙겨 입을 줄 모른다는 건 아마도 추위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준비물을 늘상 놓치고 다니는 건 누군가가 항상 챙겨줬기에 크게 당황했던 적이 없기 때문일터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포도나 귤 같은, 껍질을 까야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집 이외의 장소에서는 먹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손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란다. 평소에 할머니가 껍질 다 까고 씨까지 빼서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다보니 아이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아이가 결핍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깨어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는 더 이상 신생아가 아닌데 내가 신생아 다루듯 다 해주고 있다는 게 보였다. 


보살핌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이입장에서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로 계속 머물러 있게 되겠구나 싶어졌다. 이때부터 보호자의 보살핌은 최소한으로,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이가 스스로 느끼고 경험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것!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이 두가지만 중요하게 가져가기로 했다.  


하/지/만/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기다려주는 것은 생각보다 무진장 어렵다. 성질 급한 엄마(나)는 그냥 옷도 다 입혀주고, 씻는 것도 그냥 다 씻어주고, 책가방 정리도 그냥 다 해주는 게 훨~~~~~~~~~씬 쉽다 


머리로는 느긋하게 기다려줘야한다는 걸 알지만 복장이 터져나가는 그 과정은 차라리 안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처음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기다리는 게 힘들었는데 몇 년 하다보니 이젠 요령이 생겨서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서 내 일에 그냥 집중한다.




타고난 천성도 느긋한데다 초등 저학년까지는 죄다 챙겨주다가 갑자기 스스로 해보라니 처음엔 어리둥절 늘 뭔가 빠뜨리고 옷도 안입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할머니할아버지와의 마찰은 할많하않 ㅋ) 

담임선생님한테 전화도 여러차례 받았었다. 그래도 몇 년 뚝심있게 밀어부친 결과, 어느 새 6학년이 되었고 빠뜨리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으며 과제에 진심인 아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더이상 선생님한테 전화가 안오는 걸 보면 잘 챙기며 살고 있는 듯 하다 ㅎㅎ 

 

잊지 말자!! 

아들 인생은 아들꺼다 

아들이 배워야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아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만 개입한다 


뭐든 스스로 배우고 익혀야 자기 것이 된다 

스스로 느껴봐야지!! 암!! 

추워봐야 옷을 더 입게 되지!! 

잘한다 우리아들 !!! 


오늘도 느리게지만 잘 배워가는 우리 아들 화이팅이다!! 

작가의 이전글 잔소리꾼의 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