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작)
나는 내년에 일곱 살이 된다.
이제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선물보다 내년을 더 기다리는 것은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 때문이다.
몇 년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저녁에 할머니가 급히 병원을 다녀온 후부터 엄마, 아빠는 집에 오지 않았다.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병원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많이 아파서 면회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엄마, 아빠 없이 벌써 세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번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해에 엄마, 아빠가 돌아온다고 말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설렘과 긴장으로 가슴이 뛰곤 했다. 이번엔 정말 올 것이다.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니까...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모래 위에 항상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엄마, 아빠 얼굴이거나
내가 가지고 싶은 장난감 그림이다.
오늘도 난 놀이터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뒤에서 옆집 친구 민준이가 부른다. 민준이 오른손에는 늘 가지고 싶어 했던 커다란 킹가이즈 로봇이 들려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늘 보던 그 킹가이즈 로봇이었다.
“ 병서야, 같이 놀자 ”
“ 그래... 근데, 너 그거 언제 산 거야? ”
입술 위까지 흘러나온 맑은 콧물을 훌쩍이며 나는 웃었다.
나의 웃음을 경계하며 민준이는 로봇을 옆구리에 꼭 끼고 있었다.
한 번만 만져보자 했지만 친구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내 손에 흙이 많이 묻어 있어서 안 된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지 말걸 그랬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머니에게 저거 갖고 싶다고 한 그 로봇이다.
치과에서 울지 않고 썩은 이빨 하나 뽑기로 약속하고 엄마가 사준 것이라 한다.
나에게도 밥 먹을 때마다 아픈 이빨이 하나 있는데, 할머니에게 말해볼까? 그러면 할머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방긋 웃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그랬으니까...
텔레비전에서 본 크고 멋진 소방차를 사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는 나를 보고 방긋 웃어 주었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랑 문구점 앞을 지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커다란 소방차를 가리키곤 했다. 진열장 맨 위 줄에 놓여진 커다란 장난감을 올려다보시는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웃고 계셨다.
나는 그 웃음으로 그 소방차가 나에게도 생기는구나 하고 얼마나 기뻤었는지 모른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할머니 얼굴만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아침 눈 뜨자마자 내 머리 위에 놓인 털 스웨터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똑같은, 색깔만 다른 스웨터였다.
할머니가 저녁마다 눈에 눈물이 고여 가며 뜨던 그 스웨터가 크리스마스 선물일 줄이야...
작년에 받은 똑같은 선물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노란색 옷을 입고 웃는 모습이 가장 이쁘다고 한다.
그래서 노랑색 실로 스웨터를 떴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똥색이었다.
할머니가 미웠다.
추운 크리스마스날 아침이었지만 양말도 신지 않고 나가려 하는데, 할머니는 춥다며 스웨터를 입히셨다. 창피했다.
색깔만 노랑색으로 바뀐 스웨터를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다.
놀이터에 나와 시소에 붙어있는 고드름을 발로 차고 있을 때, 민준이가 환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그의 두 손엔 커다란 경찰차가 들려있었다.
용돈도 얼마 받은 것 같았다. 떡볶이 사준다고 해서 돌멩이 하나를 공 차듯 차며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았냐고 민준이가 물었을 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창피했다. 올해는 할머니가 선물을 깜빡 잊은 것 같다고 했다.
요즘엔 나보다 잘 잊는 일이 많다고...
그때 떡볶이집 밖에 놓인 빈 박스 한 개를 가져가도 좋은지 묻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였다. 내가 들기에도 어렵지 않을 작은 박스 하나도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들어 올리셨다.
구부정한 허리를 한 번 펴시는 듯하더니, 다시 구부러지는 허리를 어쩌지 못하고 다시 한숨을 쉬신다.
예전 같으면 어린 나이에도 안 돼 보였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오늘 만큼은 화가 풀리지 않는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떡볶이를 쉼 없이 씹고 또 씹었다.
그날 난 할머니의 선물인 스웨터를 잃어버렸다.
떡볶이가 매워서 덥다며 스웨터를 일부러 벗어놓고, 나올 때 의자 밑에 떨구고 나와 버렸다.
할머니는 내가 스웨터를 떡볶이 집에 두고 온 것 같다고 말하자, 알았다고만 하시고 굳이 찾으러 가지 않으셨다.
그렇게 작년 크리스마스는 우울하게 지나갔다.
언제부터 할머니가 뒤에 서 계셨는지 모르지만,
“ 민준아, 새 장난감 샀구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거니? ”
하시면서, 늘 지니시던 손수건으로 내 콧물을 닦아 주신다.
늘 지니시던 그 손수건에선 늘 같은 냄새가 난다.
할머니가 나에게 문구점에 한 번 가보자고 한다. 내 입가엔 절로 웃음이 나온다. 있다가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문구점을 지날 때마다, 그 장난감이 잘 있나? 누가 사가지 않았을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올려다보곤 했다.
하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때처럼 할머니와 같이 와서 보거나, 손으로 가리켜 보진 않았다. 내가 일 년 사이에 조금 더 큰 것일까?
내가 저 큰 장난감을 손으로 가리키면,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더 많이 주워 오셔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느 날 저녁 잠자리에서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날도 할머니는 종이 박스를 작은 방에 펴서 쌓고 계셨다.
“ 할머니, 우리 집에는 왜 이렇게 신문지랑 종이 박스가 많아? ”
“ 그건 말이야,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는 것과 같단다. 할머니는 다람쥐처럼 도토리를 줍고 있는 거란다. 이것으로 밥도 사고, 옷도 사고, 병서 장난감도 살 수 있지. ”
문구점 앞 쇼윈도에 놓인 커다란 킹가이즈 로봇을, 내 키보다도 작아진 우리 할머니는 힘겹게 올려다보며 말하신다.
“ 저거는 네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얘야.
할머니가 문구점 아저씨에게 팔지 말라고, 우리 손주 거라고 벌써 말해 놓았단다. 이번 겨울엔 이 할미가 도토리를 제법 많이 주웠단다. ”
그랬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더 열심히 도토리를 주웠다.
나도 우리 집에 도토리가 더 많아지기를 바랐지만, 도토리가 쌓여 갈수록 할머니의 키는 점점 작아지는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기침이 오늘 저녁 할머니를 앓아눕게 하고야 말았다.
가끔 아팠을 때도 늘 웃고 계시던 할머니의 입가는 지어지지 않는 웃음을 짓느라 떨리고 있었다.
“ 얘야, 아침에 해가 뜨면 언제나처럼 이 할미는 다 나아 있을 거야. ”
달님에게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도 같다.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도 달님은 우리 할머니 얼굴을 저리도 따뜻하게 비춰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할머니가 모아 오신 그 도토리로 달님에게 약을 달라고 소원을 빌어본다.
몇 년 전부터 돌아오지 않는 엄마, 아빠가 이제는 오지 않을 거란 것도 안다. 교통사고로 그렇게 오래 누워계시진 않을 테니까...
달님에게 다시 한번 빌어본다.
이제는 할머니가 많은 도토리를 줍지 않게 하겠다고...
엄마, 아빠 보고파 울지 않겠다고...
내가 울 때마다 쓰다듬어 주셨던 할머니의 그 따스한 손길과 미소를 다시 돌려달라고...
작품후기
동심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님을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 한편에는 오장육부 외에도 동심을 담은 보따리가 하나씩 들어있습니다. 사는 동안 가치의 기반이 되고 즐거운 기억과 감각을 되살리는 것은 동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연어들이 다시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이 인간이면 누구나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인들과 많은 경전에서도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행복의 근원이라 말합니다.
어린아이야말로 정말 해맑고 꾸밈없는 웃음으로 모두에게 기쁨을 주지만 태양 뒤의 그림자가 가장 어둡듯이 그들의 뒷모습에는 한없는 연민과 외로움의 감정들이 묻어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그림자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처럼 연민을 자극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결핍과 연민도 동심 안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