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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 Jul 16. 2024

프리츠 한센의 가구, 그리고 POUL KJÆRHOLM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재료 그 자체의 언어이다.





안녕하세요



안식년 아닌 안식년에 접어들게 된 저로서 본업과 더불어 창작활동.. 이라기엔 거창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빈도로 많은 글을 쓰거나 각종 문화생활(그러니까 쏘다니는), 전시를 다니거나


무언갈 만드는 등의 활동도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외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은 아직까지 강조하고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좋아하던 패션에 대한 관심도도 많이 떨어진 것 같긴 합니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사색하는 것에 배정되던 에너지가 많이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웃 풋도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쪽 지역부터 서서히 장마가 시작되면서 완연한 여름이 되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지쳐 멀리까지 외출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 돼버렸는데


그렇다 보니 혼자 영화 한 편 보러 나가는 것도 마음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한다는 게 이럴 때는 뜻밖의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소비 취향을 알리기 위해 하는 목적의 SNS가 아닌




영감을 위한 욕구와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것을 보고 본 것을 다른 관점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영감을 원하기 때문에 기꺼이 시간과 가치를 지불하며, 숨어있는 힌트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매우 긴 텀을 두고 서촌과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24.05.31부터 24.07.07(전시 중)까지 서촌 유스퀘이크에서


진행 중인 프리츠 한센 디자이너 [폴 케홀름] 의 전시입니다




덴마크 출신 가구 디자이너인 폴 케홀름은 국내 인지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가구 신에서 한스 베그너와 핀 율 못지않게 인정받는 대가입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소재의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그의 전시는 실제로 본인의 디자인 철학보다는


작은 파츠들과 쓰인 소재의 특성 등을 더욱 자세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재료 그 자체의 언어이다. "

_폴 케홀름






보편적으로 북유럽 건축, 가구 디자이너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의 가구와 디자인들은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유스퀘이크는 프론트가 있던 A관과 메인 전시관인 B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A관에서는 예매 티켓을 확인을 거치고 간단한 정보 안내를 받은 후, 메인 전시관 B동으로 넘어가는 동선입니다




이날 서촌은 매우 더운 날씨였는데 A관에 처음 들어서자 천정이 유리로 된 구조 탓인지


밖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더웠고 그나마 중간중간에 배치된 서큘레이터 덕에 더위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제가 방문한 날부터 전시 주최 측에서 참관객들을 위해 시원한 물을 한 병씩 제공해 주셨습니다)




폴 케홀름의 디자이너로서의 가치관과 생산 철학에 대한 내용,


활동 초기의 성과와 현실에 부딪히는 스토리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1951년 엘리멘트 체어(Element Chir)라고도 불리는 PK 25를 발표했으며,


폴 케홀름의 본격적인 데뷔를 알리는 처녀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생산성과 효율을 이유로 PK25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차후 수정된 버전의 향상된 생산성을 가진 제품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프리츠 한센 사의 평과 그들이 주고받았던 히스토리 등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A관의 마지막 벽면이었습니다




그가 가구 배치 시뮬레이션을 그린 도면이 전시되어 있었고


누구든 편안하게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하여 3D 가구 배치를 해볼 수 있는 현재와의 괴리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인 거리감과 입체감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합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전개도가 전시된 유리관 앞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의자,




아무 설명 없이 낮은 의자만 덩그러니 있어서 사람들의 눈길 한 번 받기 어려워 보였지만


유리 천정을 뚫고 들어온 빛이 내려앉은 모습이 특별한 느낌을 주어 담았던 기억입니다









A관 입구 쪽에서 가장 먼저 반겨주는 낮고 넓은 초콜릿 같은 소파입니다




처음 들어올 때 서너 명이서 오신 여성분들이 앉아서 더위를 잠시 식히고 계시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던 소파를


나가는 길에서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키가 평균보다 조금 큰 경우에는 이 정도로 낮은 의자에 앉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땅바닥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고관절이 지나치게 많이 접혀버려서 그렇게 편한 느낌은 받기 어렵습니다




물론 앉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더워서 조금 더 머물렀으면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가 A관이며,


액자에 갇힌 PK25를 마지막으로 B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다음 전시관으로 넘어가는 길이 실외여서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매 관, 매 층마다 티켓 확인과 동선 안내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괜찮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가장 좋아하지 않는 계절인 한여름에만 꼭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 같네요


좋아하지 않는 계절을 그나마 기분 좋게 보내는 법을 터득한 것 같기도 합니다







B관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포스터,




약 25분 뒤에 저 오른쪽 포스터를 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뭐.. 예쁘니까








B관 입구에 있는 오브제입니다




고정하는 부품 없이 홈에 맞춰서 조립된 형태로 보이는 오브제였습니다




보통 한국 전통 건축양식에서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형태인데


스틸로 이루어져 있으니 묘하게 특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프탑 포함 총 4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B관의 1층입니다




폴 케홀름이 자신의 가구에 사용했던 재료들을 전시해놓았으며


등나무 줄기에서 나온 소재인 케인과


어릴 적 미국 영화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돛단배의 밧줄인 핼야드를 사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질감과 패턴의 대리석을 이용해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균등한 양질의 경험을 제공할지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듯해서 재밌기도 했었습니다




철과 돌을 나무와 가죽 같은 생명에서 얻은 재료들과 같이 취급하며


마치 자신의 작품(가구)가 숨을 쉬며 사용자와 함께 늙어가는 것 같이 이야기한 것도 좋았던 부분입니다





폴 케홀름이라는 사람에게 완전히 빠지게 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작업 준칙이라는 말이 생소하면서도 매우 멋져 보였습니다


특히 심리적 기능에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 기능적으로 완벽한 것들은 대개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또는 이미, 미적으로도 완벽하다. "

_eaststarlight







그의 역작 중 하나인 PK0




그 당시엔 매우 어려웠던 합판을 구부리는 공정을 거친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는 흔하다고 할 수 있는 디자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노력과 스트레스가 가미된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두 피스가 포개어지면서 의자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는 형태로


언젠가 제 공간에서 앉아볼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2층에 다른 컬러의 PK0이 있었지만 일부러 앉아보지 않았습니다)









대표

사진 삭제





앞서 본 PK25 프레임에 핼야드를 엮어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 앉아볼 순 없었지만


왠지 가장 편안한 착좌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공식과 같은 그의 가구 분류 시스템






PK24 (팔걸이가 없는 라운지 의자)




사틴 브러시 처리된 스테인리스 프레임과 형용하기 어려운 짙고 어두운 푸른빛의 가죽이


시선을 한순간에 끌어당겼습니다



좋은 차를 보면 한 번쯤 타 보고 싶고


갓 내린 커피라던가 얼음이 들어간 술을 보면 마시고 싶은,


아름다운 이성을 보면 하룻 밤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과 같은



그저 앉아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가 샘솟는 자태였습니다






머지않은 미래를 위해 앉는 것을 미뤄 둔 PK0






정성스럽게 짜여진 우드 파티션이 있는 3층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가구들은 전부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고


아래층에서 본 거의 대부분의 재료를 직접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반부에 A관에서 찍었던 폴 케홀름의 전개 도면과


상당 부분 흡사한 가구 배치였던 것 같습니다







검은색 가죽소파 러버인 저에게 정말 충격을 선사할 만큼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어서


한참을 앉아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체감으로는 거의 15 - 20분은 앉아있던 것 같은데



포스터도 사고 싶고



날씨는 덥고



뒤에 아직 한참 남은 일정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10분 남짓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업장(무언가를 판매하는)이 아닌 사무 공간을 갖게 된다면


프리츠 한센, 핀 율의 가구만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핀 율 특유의 차분한 목재 가구에 폴 케홀름의 직선적이고 효율적인 스틸 가구가 맞물린다면


생각만 해도 일이 잘 될 것 같달까요




점점 가구에 대한 눈도 높아져가는 것 같아 무서울 따름입니다







포스터와 함께 판매하던 아트 북인데 솔직히 이것까지는 필요 없어서(왜냐하면 이건 43.0이었거든요)


PK25가 프린팅된 포스터만 구입했습니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도 체감온도 약 33도의 무더운 날씨 탓에


이미 긴팔 셔츠를 입은 제 등엔 땀이 흥건했었습니다




그래도 탁 트인 루프탑에서 제가 좋아하는 서촌의 모습을 보고 싶어 올라갔고


이날 가장 큰 판단 미스였습니다 하하




그래도 우연히 철제 프레임을 찍으려다가


건진 천천히라는 문구가 인상 깊은 사진입니다








올해 제가 본 가장 여름 같은 장면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산인 인왕산, 종로를 푸르게 덮은 가로수


이보다 더 여름 같은 장면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옥상(지옥)으로 가는 길




여기서부터 사실 잘못됨을 직감했습니다


관람료 천 원 올리고 에어컨 좀 파워 냉방으로 틀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가구를 전시한다는 개념이 어떤 이에겐 생소하거나


사치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첫 월급을 받으면 가장 먼저 자신의 의자를 구입한다는


덴마크인들의 마음가짐을 떠올려본다면 충분한 이해가 가실 겁니다




소중한 첫 월급으로 우린 무엇을 소비했나요


그 소비가 기억이 나시나요?


(또는 주변에 남아있나요?)




우리는 실내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앉거나 기대서 보냅니다


엷은 휴식과 깊은 휴식,




홀로, 그리고 친구 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떠올려보면


항상 가구들이 존재했습니다




전시를 보고 나오니


가구는 어쩌면 우리의 신체와 마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한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 줬던 전시,


프리츠 한센 - 폴 케홀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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