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나'로 살기를 시작합니다

강박, 상처, 자책으로부터의 해방 선언

by 이유


오늘 아침 특별한 감상을 남긴 일이 있었다. 출근 직전, 집에서 디카페인 분말을 두고 나온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즘 건강 관리의 일환으로 '진짜' 커피를 자제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무시하고 그냥 차에 올라탔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보통 '이게 뭐?' 싶을 것 같은데, 나에게는 이게 참 별일이었다. 당신들도 예전의 나를 알고 나면 칭찬해 주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라면 물건을 두고 온 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곧장 집으로 돌아가 물건을 챙겨서 다시 나왔다. 귀찮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근데 오늘은 그냥 그랬던 거다.


'까짓 거 없으면 좀 어때. 커피 내려서 연하게 마시면 되지.'


마음이 좀 가벼웠다. 아침의 나는 조금 느슨했고, 그 느슨함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운전을 하던 중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언젠가 꽤 깊이 만났던 사람. 그 기억은 늘 복잡하고 무거웠다.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마음을 줬는지, 왜 그렇게까지 상처받았는지, 나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흘려보냈던 감정들이 있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작게 만들던 감정들이 먼저 올라왔었다.


근데 오늘은, 그냥… 그 사람도 나만큼 서툴렀던 걸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잘 몰랐고 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아직 완전히 다 털어낸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아프게 들춰지진 않는다. 나도 모르게 '이제 곧 용서할 수 있을지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고요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게 맞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는지도. 완전한 해방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해방의 시작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선배를 마주쳤다. 인사하면서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이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웃기고 어이가 없었다.


'왜 저렇게 보지. 나 오늘 너무 예쁜가?'


불과 몇 달 전의 나라면 선배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을 거다. '내가 뭐 이상했나?', '나 무슨 잘못했나?'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을 텐데, 오늘은 '나 오늘 너무 예쁜가?'라는 생각만 한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거울 앞에 선 것도 아니고 누가 예쁘다 말해 준 것도 아닌데, 그냥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거다. 그걸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그저 웃겼을 뿐. 이런 순간들이 쌓이니까, '이제 진짜 내가 바뀌고 있는 건가?' 싶은 거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나 보다. 저녁에는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는데 한 사람이 내게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말을 건넨 것이다. 처음엔 그냥, 오늘따라 안경을 안 쓰고 나가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풍기는 에너지가 달라진 걸까.


1차만 즐기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어영부영 2차 노래방까지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또 작지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지 가깝지는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아직도 조금은 어렵고, 특히 그중에 한두 명이라도 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작아지곤 했던 나.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편하지만은 않았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곡을 부르고 나왔다.


운동을 안 한 지가 오래돼서 배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래서 고음을 지를 때 목이 염소처럼 떨렸지만 별로 쪽팔리지도 않았다. 다 놀고 난 뒤 목이 좀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 사소했던 장면이, 스스로를 꽤 괜찮게 느끼게 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런 변화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불과 지난 겨울만 해도 더 편한 사람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진짜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불행 전시를 싫어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불행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불행 전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보이는 것 같아 그런 부류를 싫어했던 거다. 나는 불행했었다. 잘 알고 있었지만 티는 안 내려고 노력했었다. 남들의 눈에까지 불쌍해 보이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내 뜻대로 잘되었었는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나는 완벽해야만 안심됐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쉽게 무너졌고, 모든 실수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도구로 써버리곤 했다. 그게 너무 익숙해서 그런 삶이 힘들다고조차 생각을 못 하고 살았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었단 걸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들이 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한테 온 변화는 거창하지 않았다.


사람을 새로 만나고,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고,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는 선택들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열린 것 같다. 매번 용기 낸 것도 아니고, 그냥 어떻게든 버티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나를 덜 몰아붙이고 있었다. 내가 나를 아껴 주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내 따뜻한 마음이, 사랑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그걸 자각한 게 오늘이었다.






그래서 글을 써 보기로 했다. 더 늦기 전에. 이런 감정들을 그냥 지나치는 게 아까워졌다.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걸, 말로 꺼내보고 싶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지만, 회복 중이라는 걸 몸소 느낀다. 내가 나를 좀 더 편하게 대하게 되는 중이고, 그래서 이제서야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의 나는 내일을 버티기 위해 오늘을 깎아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매일매일 내일이 기대된다. 출근길이 그다지 싫지 않고, 일상은 가볍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수월하다.


대단한 결심을 한 건 아니지만 작은 감정 하나하나를 흘려보내지 않기로 했다.





오늘부터, 하루하루, 나는 나로 살기를 시작한다.


평생에 걸쳐 함께해 온 불완벽한 완벽주의에서, 한순간에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느슨해져 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뻔한 일상 속에서 찾아낸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에 파묻히기로 한다.





이유의 첫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