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였을까, 고대의 기억을 시로 써보다”
어느 날, 바람이 숨을 죽이고, 땅이 무언가를 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땅은 지금의 서귀포 어딘가였고, 아직 이름도, 길도, 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돌이 열렸다.
아무도 두드리지 않았는데, 돌이 스스로 갈라졌다.
마치 오래 기다린 무언가가, 드디어 깨어나는 것처럼.
거기서 세 사람이 솟아올랐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그들은 땅에서 왔지만, 짐승도 아니었고 신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손에는 활을 들고 있었고, 눈에는 굶주린 빛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았고, 이름을 나누어 가졌다.
사냥을 하며 살았고, 별을 세며 잠들었고,
고요한 바람에도 의미를 붙였다.
무언가 오고 있다는 걸, 그들은 느꼈다.
자신들이 이 세상의 시작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이 섬의 시작일 수는 있다는 걸.
그리고,
바다가 가져왔다.
동쪽에서 붉은 함 하나,
그 속엔 사람의 형상을 한 파도 세 개.
벽랑국에서 온 공주들이었다.
그날, 바다는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바다는 잠잠해졌다.
함께 밥을 지어 먹고, 불을 피우고,
씨앗을 심고, 아이를 낳고,
이 섬에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났다.
그러니,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제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돌에서 솟은 사람들과, 바다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서툴지만 아름다웠던 첫 번째 약속이었다고.”
학부 시절, 여러 전공 수업들 가운데 특히 인상 깊게 남은 건 문학사 수업이었습니다.
고전문학이든 현대문학이든 모두 흥미로웠지만, 특히 고대문학을 접할 때면 처음엔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던 작품들이 이야기의 구조와 배경을 하나하나 들여다볼수록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온 시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눈앞에 펼쳐진 ‘발자국들’을 따라가며 해석하고 상상하는 고대문학은 어느새 가장 현실감 있는 문학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꺼내 든 문학사 수업 필기 노트.
고대문학 첫 장 한쪽에 적혀 있던 낱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주도: 탐라(탐나는 곳), 삼성신화, 고·양·부씨, 김녕괴내깃당본풀이...”
처음엔 단어들의 나열처럼 보였던 이 기록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니 마치 신화의 암호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제주도의 시조 신화, 즉 탐라 건국 신화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왜 제주에서는 사람들이 돌에서 솟아났다고 말했을까?’
‘바다 건너 온 공주들은 왜 붉은 함에 타고 왔을까?’
그 질문은 곧 ‘우리는 언제부터 함께였을까?’라는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 이어졌고, 그 물음 끝에서 하나의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돌에서 솟은 사람들』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고대 신화를 단순히 옮긴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담긴 공존과 시작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낸 시적 상상입니다.
고대문학이 낯설게 느껴졌던 누군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그 낡고도 새로운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돌에서 솟은 사람들』은 제주의 시조 신화, 바로 ‘탐라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한 시입니다.
이 신화는 지금의 제주시 중심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이라는 세 개의 구멍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세 인물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활을 들고 사냥하며 살아갔고, 서로 다투지 않고 협력하는 모습으로 공동체의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쪽 바다에서 붉은 나무 상자(함) 하나가 떠내려왔습니다. 그 안에는 먼 나라 벽랑국에서 온 세 명의 공주와 함께,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씨앗과 가축이 실려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공주들과 혼인했고, 함께 밭을 갈고 불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이들이 함께 만든 삶이 제주의 첫 공동체가 되었고, 훗날 탐라국(耽羅國)이라는 나라로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신화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 씨족 사회가 농경 생활을 바탕으로 국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땅에서 솟은 존재와 바다를 건너온 존재가 만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되짚게 합니다.
『돌에서 솟은 사람들』은 이 신화를 바탕으로 ‘우리는 언제부터 함께였을까’라는 물음을 시의 언어로 풀어본 작품입니다. 신화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바라보며, 우리가 처음으로 ‘우리’가 되었던 순간을 상상해본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