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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ry of Marin Mar 05. 2022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을 보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운 당신에게

오늘 새벽은 유난히 잠이 오질 않는다. 아마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느낌일 것이다. 피곤해서 침대 위에 누웠는데 막상 눕고 보니 정신은 말짱해지고 몸도 쑤시지 않아서 몇 시간 동안 잠을 설치는 특유의 그 느낌. 요새 들어선 더 자주 느끼는 것 같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난 몇 달 전, 내 인생 처음으로 처방전을 받지 않고 약국에 갔다. 물론 처방전 없이 전문의약품을 구매하러 온 것은 아니고, 눈독을 들여놓은 일반의약품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우울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일 때의 나는 누군가와 쉽게 친해지고, 정을 많이 주고, 여럿이서 있을 때에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이 많다'라는 말을 반대로 하면, 그것이 '상처에 가장 취약한 성격이다'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한번 친해진 사람에겐 정이란 정은 다 퍼주는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친구가 나를 뒤흔들고, 무너뜨린 채 그렇게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하필이면 학교에 등교하면서 나의 연락을 전부 차단한 것을 알아버린 바람에 며칠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일단 무의식적으로 내 정신을 붙잡는 게 먼저였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과 아무런 생각 없이 며칠을 지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몇 달 동안을 어둠에 빠져 보냈다. 그 스트레스는 시험기간이 되면 나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내 마음에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이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친구들의 정성 어린 보호 덕에 나는 중학교 마지막 시험기간이었던 2020년 11월을 잘 버텨내고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아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아예 새로운 선생님들을 만나고, 아예 새로운 시설에 들어가서 빠르게 적응을 해야 하는 상황인 데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공부량이 밀려들어오니 정말 숨이 턱턱 막혔다. 친구들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벌써 무리를 만들고 적응을 하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물론 혼자 외롭게 앉아 슬픈 눈으로 자기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이 말을 걸어주고 친해져 준 덕분에 그 불안감은 금방 해소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중학생 시절의 생각하기도 싫은 그 고통이 남아있었다. 이쯤 되면 나 스스로가 싫어지는 지경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나를 괴롭히던 그 아이의 생각은 중간고사 기간이 되자 완전히 나를 덮쳤다. 시험이라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그 어둠은 1학기가 끝날 때까지 내 마음속을 철저히 지배했다.

이 날이 우울을 떨쳐내기 위해 처음으로 움직인 날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약국에 찾아갔다. 항상 의사 선생님의 처방전을 들고 가서 약사님이 약을 꺼내시는 소리, 알약들이 세팅되는 소리와 조제 기를 통해 조제되는 소리까지 약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항상 즐겨 듣던 나였는데 그날은 약국에 있던 시간이 단 1분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국에 가기 전 나와 중학생 때부터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혼자 약국에 가기 너무 외로웠던 나는 친구에게 큰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 약 사야 할 게 있는데 혼자 가기가 좀 그래서. 같이 가줄 수 있어? 지하상가도 둘러보고 가자."

그 친구는 겉으론 말을 험하게 하지만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친구였다. 이번에도 다행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 괜찮은 시간 알려주면 내가 맞춰서 준비할 테니까 늦지 않게 우리 집 앞으로 와. ATM기로 돈을 보내야 해서."

"그래."

나는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길이 외롭진 않겠구나.

나는 핸드폰으로 카카오 뱅크 앱을 열어 내 계좌에 남은 잔액을 확인했다. 26만 원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 순간이 정말 감사했다. 이 순간을 대비해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둔 것이 빛을 발휘했다. 오늘만큼은 사고 싶은 것을 다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며 스트레스를 맘껏 풀겠다는 일념으로 친구를 만나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약국은 영등포역 근처에 있었다. 난 영등포역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살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버스를 내리고도 친구와 함께 한참을 헤맸다. 영등포역에 갈 때는 대부분 타임스퀘어에 영화를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인데, 고작 약국 하나 찾자고 다리 아파가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또 비집는 우리의 모습의 나와 친구 모두 스스로 어이없어했다.

약국에 도착한 뒤 나는 약사님에게 바로 물었다.

"마인트롤 있나요?"

내가 출발하기 전 약국에 전화를 해둔 덕분인지 약사님이 나를 바로 알아보셨다.

"아, 아까 전화 주신 분 맞으세요? 마인트롤 저기 위에 있어서 제가 꺼내드릴게요."

약사님은 약을 꺼내오셨다. 무려 90알이 들어있는 대용량의 약이었다. 그만큼 가격도 어마어마했다. 내가 듣기로는 4만 원이 넘어가는 가격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들은 답변은 의외였다. 약사님은 아무렇지 않게 가격을 말하셨다.

"24,000원입니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랐다. 비싸면 5만 원도 할 것 같은 약이었기 때문에 큰돈 깨질 각오 하고 약국에 들렀는데 내가 생각한 가격보다 절반이 넘게 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눈과 입이 동그래져 약사님께 물었다.

"인터넷에선 40000원이라고 들었는데 엄청 싸게 파시네요?"

약사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약이라는 건 우리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약이 비싸서 구매를 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저희는 다른 곳보다 싼 가격에 약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돈이 많이 남았네요."

나의 말을 들은 약사님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시며 복약 지도를 해주셨다.

"아유, 괜찮습니다. 그리고 방금 구매하신 약이 전화로 문의하신 노이로민(내가 구매한 약과 똑같은 성분에 이름만 다른 약이다.) 보다 훨씬 싸니까 앞으로도 자주 오세요. 약은 하루에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드신 식후에 한 알씩 드시면 되시고, 만약 아침을 거르셨다 하시면 점심식사, 저녁식사 식후 한 알 드신 다음 자기 전에 한 알 드시면 되세요. 그리고 이 약은 경증 우울증에 사용되는 약이기 때문에 잘 드시고 효과가 없으시다면 병원에 가보시는 것을 추천해요. 또, 90알 전부 복용을 다 끝내시기 전까지는 절대 햇빛을 많이 쐬시면 안 됩니다. 산책 정도는 괜찮지만 햇빛 아래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있으시면 안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약국을 나와 지하상가를 둘러보고 친구와 헤어져 집에 돌아온 나는 그다음 날부터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뒤 효과가 나타났다. 새벽마다 들던 우울한 생각은 거의 사라졌으며, 감정 기복도 확 줄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막 떠올랐고 대학에 들어가면 배우고 싶은 전공들이 머릿속에 미친 듯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를 잘 버티고 현재 2학년이 되었다.

현재까지 내가 복용하고 있는 약이다. 노란 약이 내가 복용중인 항우울제이며 빨간 약은 모자른 잠 때문에 생길 구내염을 대비해 구비해둔 구내염 약.

그런데, 어제 실수로 약을 학교에 놓고 와버리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나는 약 복용 전까진 잠을 잘 못 자다가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불면증이 싹 나았는데, 약을 놓고 오자마자 바로 잠이 오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난 잔병치레가 많아 어릴 때부터 약을 많이 먹던 편이었는데, 요새는 계속 깜빡거려서 하루 세 알 먹어야 하는 약을 하루 두 알 정도만 먹거나 하루 한 알 정도만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아예 놓고 와버렸네 쩝...


오늘만은 이 감정에 깊이 젖어있고 싶다.
연보라와 하늘색이 채워주는 내 마음을 온전히 즐겨보고 싶다.

약 복용량이 줄어들다가 아예 끊어지니 뭔가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누군가를 향한 깊은 그리움이랄까... 아마도 아주 어릴 적 만났던 친구들, 여행에서 만나서 하루 동안 친해지고 바로 헤어졌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되살아난 듯하다. 돌아가고 싶고,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순간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말을 놓고 친해질 수 있었던 나의 건강했던 시절... 내가 느끼는 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 아이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나의 흔적이 남아있을지, 그 시절의 순수함을 아직까지 잃지 않았을지... 세월이 흐르면 짧게나마 만났던 그곳에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여러 생각이 뒤섞여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감정을 이겨내고 싶지 않다. 그저, 다 받아들이고 싶다. 대학입시와 수능이라는 현생에 치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이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가득히 느끼고, 즐기고 싶을 뿐이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지금 이 마음과 기억은 우리 머릿속 어느 깊은 곳에 들어가 스스로 자물쇠를 채울 테지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긴 잠에 빠지기 전에, 지금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지금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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