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던 시간

by 불멍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할머니는 평생을 절에 다니셨다. 매번 가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등(燈)을 다시고, 꾸준히 가족을 위한 기도를 올리러 다니셨다. 엄마는 젊은 시절 교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하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그 시절, 절에 다니시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친구들을 따라 교회도, 성당도 가곤했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작은 선물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특정 종교가 없던 나는 교회도, 성당도, 절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갔다. 성당을 꾸준히 다닌 시기도 있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 시기도 있었다. 때로는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법당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기도 했다. 사서삼경을 읽으며 유교의 사유를 공부했던 시기도 있었다. 유교는 신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인간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공부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종교를 믿음의 개념보다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오래된 사유의 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종교는 분명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 힘은 어떤 신의 이름에서 오기보다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모든 종교는 출발점에서 인간의 불완전함을 말한다. 두려움과 상실, 고통과 불안, 그리고 그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각자의 언어로 제시한다.


잘 알려져있는 ‘파스칼의 내기’는 신의 존재가 불확실할 때, 신을 믿는 것이 기댓값 측면에서 이득이라는 기독교 변증론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인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으니, 우리는 이미 선택의 상황에 놓여 있다. 신을 믿고 살았는데 신이 없다면 잃는 것은 유한하지만, 신을 믿지 않았는데 신이 존재한다면 그 손실은 무한하다는 논리다. 파스칼은 이를 통해 신앙을 강요하기보다, 인간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더 이상 초월적 존재에 기대지 말라고 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하며, 그 책임을 온전히 떠안아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의 생각은 단호하고 급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은 인간에게 아무런 설명도, 위로도 제공하지 않는다. 의미는 주어지지 않고, 세계는 침묵하며, 인간은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니체의 생각은 바로 그 냉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요구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그 현실을 끝까지 인간 혼자의 몫으로만 감당해야 하는지, 그 지점에서 다시 신의 존재를 묻게 된다.


나는 니체적 의미의 무신론자는 아니다. 광대한 우주의 시공간 속에서, 모든 것을 인간의 의지와 이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세계가 너무 크고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신은 특정 종교의 얼굴을 한 인격신이라기보다, 이 세계를 관통하는 질서나 원리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교회에서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네' 라는 찬송가를 들었을때 이유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다. 살아 계신 동안, 말없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할머니와 부모님이 안 계신 이 세상에서 이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은 있을까. 아마도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기도라는 행위는 꼭 무릎을 꿇고 신에게 말을 건네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마음에 오래 품는 일, 누군가 잘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 더 좋은 사람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 어쩌면 그런것들이 기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다시말하면, 앞날이 완전히 보이지 않아도,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삶이 완전히 혼자가 되지는 않도록 마음 한편에서 계속 불을 밝혀주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이 벌을 내렸다.” “천벌을 받았다.” 이 말들은 설명되지 않는 불행과 몰락 앞에서, 인간이 책임의 주체를 자신 너머에 두고 싶어 하는 의미라는 생각이다. 인과응보는 신이 분노하여 벌을 내린다기보다, 선택과 태도가 세계의 질서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되돌아온다는 의미에 가깝다. 즉각적인 응징은 없을지라도, 삶 전체를 길게 놓고 보면 어떤 결정들은 결국 자기 몫의 결과를 갖고 온다. 불교의 전생도 이와 닿아 있다. 전생은 단순한 환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행위와 결과가 시간 속에서 이어진다는 인과의 관점이라는 생각이다. 하나의 삶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이전의 조건과 선택이 축적된 결과이며, 그 흐름은 다시 다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완전히 무책임하게 살아갈 수 없으며,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균형을 회복하려 한다는 생각. 그것이 신의 이름으로 불리든, 우주의 질서로 설명되든, 분명 그 흐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종교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다. 신을 단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광대한 우주의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나약함을 서로를 향한 기도로 건네는 일. 그것이 내가 선택한 나만의 종교적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