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9월 6일(토), 이곳은 방콕 수완나폼 신공항의 탑승객 대기실이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7시간을 걸려 여기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내일 오전 10시에 카트만두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이곳 대기실은 변한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휘황찬란한 면세점들과 식당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들과 손을 잡고 면세품들을 구경하며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외톨이이자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먼저 작년에 잠을 잤던 곳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어서 이리저리 한 시간쯤 둘러보다가 포기하고 우리나라 LG전자의 TV 앞에 자리를 잡고 의자 3개를 모아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작년에 잤던 곳은 불빛도 없고 구석에 있었으며 은폐 엄폐하기가 참 편리한 곳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냥 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다.
내 옆에서는 인도 계 학생 대여섯 명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친구들의 수다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자장가로 생각하고 의자 위에 누웠다. 그런데 이곳이 태국임에도 불구하고 공항 안은 강한 에어컨 바람으로 한기가 들었다. 그래서 다시 배낭에서 가을용 등산복을 꺼내서 입고 에베레스트 모자를 쓴 다음 이불을 덮고 다시 누웠다. 그리고 소형 배낭을 오른팔에 낀 후 다시 면세점에서 산 선물용 화장품과 파스가 담긴 쇼핑백을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이제 내일부터 다시 한번 모험이 시작되는구나, 몸 건강히 잘 다녀오자, 그런데 내일 라메쉬 형과 꺼멀이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에 안 나오면 어떡하지? 메일로 꼭 마중 나온다고 했으니깐…그래도 안 나오면... 걱정 말자...난 항상 운이 좋은 놈이니깐 무조건 잘될 거야'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피곤한 눈이 떠졌다.
어젯밤에 작년 네팔 여행을 생각하다가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어느새 여행 둘째 날이 밝았다. 옆에는 어제의 그 인도 계 학생들이 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 거의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배낭과 선물이 담긴 쇼핑백은 내 옆에 있었다.
네팔로 가는 비행기가 오전 10시이고 지금 시간은 6시 30분 정도이니 아직도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지만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인 히말라야로의 여행, 그것도 혼자이다 보니 몸과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어제의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고 세상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꿋꿋이 살아남아야 하는 생활 여행자로 바뀌었다.
공항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고 짐을 다시 꾸린 후 간식용 소시지로 아침 허기를 달랬다.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할까 하다가 이 비용도 아깝고 몇 시간 만 기다리면 타이항공에서 주는 기내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은 조금 참기로 했다. 안나푸르나 지도와 스크립트 자료를 꺼내서 다시 한번 여행 일정을 체크해 보았다. 내가 휴가를 낸 기간은 총 15박 16일이지만 AR 트레킹을 하려면 보통 사람은 15일~2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직항으로 운행되던 대한항공 비행기 스케줄이 9월엔 비 성수기로 인해 운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년과 같이 태국 방콕 공항을 경유해 다음날 카트만두에 도착하는 타이항공을 예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비행기 이동 시간으로만 4일을 다 소비해버리니 나에게 남는 트레킹 일정은 12일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떡하든 12일 안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싶었지만 워낙 변수가 많아서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최선을 다해보자고 내 자신에 주문을 걸었다.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에서의 재회]
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 비행기 탑승 장으로 이동하였다. 작년의 탑승 장과 똑같은 곳에서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주위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네팔 사람들이었고 서양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도 더러 보였지만 한국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네팔에서 9월 초는 아직도 우기라 비 성수기이고 추석 명절이 들어있기 때문에 한국인 여행자는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작년처럼 고독하지만 내 자신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특별하고 행복한 여행이 될 것임을 느꼈다. 드디어 탑승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짐을 들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비행기 안에 자리를 잡고 심호흡을 가다듬고 이렇게 외쳤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자신을 믿자.'
방콕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의 기내식은 한국에서 방콕으로 이동할 때의 기내식과 비교해서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순식간에 기내식을 비우고 다시 여행 일정을 점검하였다. 이렇게 2시간여를 날아서 드디어 카트만두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렸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히말라야 산맥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히말라야를 다시 보자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긴장이 더 되는 것 같았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god bless me, god bless me …그런데 진짜로 마중 나오기로 한 라메쉬 형과 꺼멀이 안 나오면 어떡하지? 에이, 괜찮아,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이니깐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 순간 비행기가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에 무사히 착륙을 하였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자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고 사람들이 내렸다. 나도 짐을 들고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후끈한 열기가 내 주위를 감쌌다. 정말 느낌이 새로웠다.
'드디어 1년 만에 네팔 땅을 다시 밟았구나'
공항 주위의 비행기와 건물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재빨리 입국심사 장으로 이동하였다. 많은 외국인들 때문에 입국 심사장에는 긴 줄이 벌써 늘어서 있었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면 서둘러 입국 심사장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네팔 사람들이 워낙 일 처리 속도가 늦고 여유를 부리기에 긴 줄에 서다 보면 다른 사람보다 많게는 1시간 이상 비자를 늦게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서 비자를 미리 받아온 여행자라면 비자 신청서를 다시 작성할 필요가 없으므로 바로 With Visa로 가면 되고 비자가 없는 사람들은 줄 뒤쪽에 있는 신청서를 작성한 후 Without Visa에 줄에 서면 된다. 나는 비자를 미리 받아오진 않았고 신청서만 미리 작성을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청서를 작성하는 동안 먼저 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15일짜리 비자 비용 25달러를 내고 영수증을 받았다. 비자 비용은 체류 기간에 따라 15일 $25, 30일 $40, 90일 $100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이후 뒤에 있는 네팔인에게 여권과 입국 카드, 사진이 한 장 부착된 비자 신청서와 비자 영수증을 제시하면 비자 스티커를 여권에 부착해 준다.
혹시라도 입국이 거절될 까봐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공손히 심사를 받았다. 드디어 입국심사 장에서 네팔 비자와 입국허가를 받고 짐을 찾으러 갔다. 턴테이블의 입구에서는 가방을 만들어 내듯이 가지 각색의 가방이 쏟아져 나왔다. 네팔이나 인도에 여행을 가면 절대로 중요한 물품을 배낭 위쪽에 그것도 지퍼가 있는 곳엔 넣어놔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항 직원들이 공공연하게 배낭 물건들을 슬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여행자들은 아예 배낭을 체인 자물쇠로 꽁꽁 묶어서 짐을 붙이기도 했다. 몇 년 전 인도에 여행 갔을 때도 한 순진한 한국 대학생이 비싼 디지털 카메라를 사촌에게 빌렸는데 짐을 찾고 보니 감쪽같이 사라져서 애를 먹었던 적도 있다. (지금도 비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무거운 배낭을 힘겹게 끌어냈다. 먼저 짐이 이상 없는지 살폈다. 그런데 커버로 덮어놨던 배낭 오른쪽이 허전했다. 양쪽 옆에 넣어놨던 소주 500미리 중에서 오른쪽에 넣어놨던 게 빠져버린 것이다. 너무나 아쉬워서 혹시나 하고 턴테이블 주위를 몇 번이나 점검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넣어놨는데 중간에 사라지다니 갑자기 다리에 기운이 빠졌다. 소주는 트레킹 하는 도중에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500미리 한 병은 라메쉬 형과 함께 마시고 나머지 한 병은 비상용으로 아껴두려고 했는데 잃어버렸으니 그만큼 실망감도 컸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찾고 드디어 출국장으로 빠져나왔다. 주위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수많은 네팔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를 보고 몇몇이 다가와 taxi, hotel 등을 외쳐대며 호객행위를 하였다. 나는 분주히 라메쉬 형과 꺼멀을 찾았다. 사람이 많아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혹 정말로 마중을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역시나 라메쉬 형과 꺼멀은 바로 그 자리에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김없이 서있었다.
라메쉬형이 유창한 한국어로 나를 반겼다. "우아, 다시 만났네요, **씨 오랜만이에요"
난 너무나 반갑고 감격스럽고 한편으론 안도가 되어 다가가자마자 두 사람을 꽉 껴안았다.
"라메쉬 형, 꺼멀 Hi, nice to see you again, I'm back in Nepal"
꺼멀은 1년 만에 배불뚝이로 변해있었다. 운동화에 기지 바지, 그리고 푸른색 셔츠를 입고 나를 반기는 꺼멀, 옷은 조금 촌스러웠지만 꺼멀 입장에서는 제일로 좋은 옷을 입고 마중 나왔음을 느꼈다. 꺼멀은 습관적으로 내 배낭을 메고 다른 짐도 들으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하고 서둘러 택시를 타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라메쉬 형은 자신의 오토바이로 움직이고 나와 꺼멀은 택시를 타고 외국인 여행자들의 숙소와 기념품 가게, 여행사들이 밀집해 있는 타멜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