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필요한 한국

개인의 철학과 도덕이 부재한 시대

by krush

어릴 적 사회수업을 들었을 때의 기억이 있다.


반을 총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죄수의 딜레마 실험을 진행했는데,

상대방과 협력을 하면 계속 점수를 받고, 내가 상대방을 배신하면 더 많은 점수를, 그리고 동시에 배신하면 점수를 잃는 구조였다.


사회 선생님께서는 가장 점수가 높은 모든 팀에게 음료수를 나눠주겠다라고 하셨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모두가 음료수를 먹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모두에게 외쳤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다 같이 협력하고 다 같이 음료수 마시자."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다들 처음에는 협력을 하다가 한 팀이 배신하는 일이 일어났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 물으니 "게임인데 이래야 더 재밌잖아"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부터 배신과 협력을 번갈아가며 하고, 4팀 중 한 팀과 함께 연합해서 공격하는 수단도 펼쳐봤지만, 초반에 3팀이 협력하고 한 팀이 배신함으로써 얻어진 격차를 따라가기는 불가능했고, 그 팀이 최종으로 승리했다.


비록 사회선생님께서는 모두에게 음료수를 나눠주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기억과 충격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물론 어릴 적 일이고 말 그대로 재밌자고 할 만한 놀이었지만, 그 덕분인지 나는 그 인상이 한국 사회에 항상 남아있다. 당시의 내 감정은 '배신을 당하고 나니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상태.' 신뢰가 사라진 그 이후의 나의 선택들은 음료수를 먹기 위함이 아니라 배신한 저 팀을 떨궈내야 정의가 실현된다는 일념뿐이었다.


나이가 들고, 대학과 대학원을 재학 중인 지금 여러 인간관계를 맺으며 분명 좋은 점들도 많았지만, 탈도 참 많았다. 피해자는 피해만 보고, 가해자와 방관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개인적인 사건은 말하기 어렵지만, 전세사기 문제만 생각하더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공유받지 못하는 세입자 피해자와 정보를 알면서도 이득을 위해 이를 묵인하는 임대인, 그리고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공인중개사처럼 이런 작은 사회의 갈등하나 하나들은 서로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며 이에 대해 '가해자의 자산이 더 많고 권력이 더 강하다'라는 이유로 이를 처벌하지 않는 사회는 이를 더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반복은 인간 개인에게 '권력이 최고고 돈은 신이다.'라는 식의 인식, 그리고 '태어난 것도 능력, 운도 능력'과 같은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프레임을 씌우게 되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 그리고 살아온 발자취에서 남들에게 베풀고 선한 영향력을 펼쳤던 이력들보다, 마지막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고 저기서 나에게 어떤 콩고물이 떨어질 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인간 사회에 철학은 그렇게 사라진다. 신뢰가 사라진 사회에서 통용되는 철학은 오직 '힘'과 '돈'이며, 이를 거스를 수 있는 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자조적으로 '이미 우리나라는 망했어', '꼬우면 너도 돈 많이 벌고 그다음에 바꾸면 되지'와 같은 말들을 내뱉는다.


이런 철학이 사라진 사회는 정말 많은 문제를 낳아 왔다. 저출산과 자살률만 예시로 들어도 충분할 듯하다. 사람의 성품이나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닌 현재 내 눈에 보이는 상태에만 집중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서로가 서로를 쉽게 재단하고 비교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이는 단순 사람과 사람의 관계부터, 사람과 직업 등 다양한 관계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등에서부터 '그 사람이 왜 그런 궤적을 따라왔는지' 보다, 상대방이 내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가 더 중요하다.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힘든 집안에서 살아서 아득바득 살아 작은 집을 얻은 반면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집안에서 자라 돈 걱정 없이 살다가 큰 집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사람이 가진 역량과 노력은 전자가 더 강할 확률이 높지만, 결과만 보는 사회에서는 후자가 더 뛰어난 사람으로 여겨진다.


직업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공부를 잘하고, 시험을 잘 볼 수는 당연히 없다. 상대적으로 낮게 여겨지는 블루칼라 직업군도 당연히 그 안에서의 능력과, 좋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센스와, 오랜 기간에서 묻어나는 짬밥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려지는 등 그 안에서의 실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블루칼라 직군의 선호도는 높지 않다.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서 그들의 노력의 과정들은 인정받기 힘들고, 자세히 보지도 않는다.


학생 때, '울지 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를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그 당시 많은 학교들이 이를 틀어줬을 텐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참 집착하는 '의사'라는 가장 높다고 여겨지는 신분의 사람이 자신의 신념 하나로 아프리카 수단으로 향해서 그 나라의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정말 큰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 사회의 시선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바보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놓고,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아니라 굳이 자기 스스로 힘든 길을 택한 사람이니 말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어서 다큐멘터리에 나온 것은 맞으나, 지금 시대에 얼마나 이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경외감'과 '타인화'가 일어나기 가장 좋은 인물인 듯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만 나는 저렇게는 못 살겠어'라는 필자도 동의하는 가치관은 돌이켜보면 가장 스스로(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이 긴 글은 내 궤적을 돌아보기 위함에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에 불확실성이 커서 어떤 목표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도 그 목표에 다다르기 쉽지 않다고.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목표를 실제적 무언가의 달성으로 놓는 측면에서만 그렇다. 목표가 아닌 내 안에서 우러나온 방향은 불확실하지 않고 꿋꿋하다.


나는 결국 미래의 목표보다는 방향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A/B의 선택의 기회가 있을 때, 어떤 목표로 다다르기 유리해 보이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내가 미리 정해놓은 나를 위한 방향 즉,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선택 기준을 통해 앞으로의 인생을 헤쳐나가고 싶다. 예를 들자면, 의대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보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 등 제각각 나름의 의미와 이유를 찾은 뒤 이를 더 발전시킬 방향으로 공부를 하는 것. 또는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남들이 잘 가는 길을 택하기보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취향과 끊임없는 고민과 그리고 무의식에 잠재된 충동의 선택을 더 선호하려 한다.


목표가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내적 동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남들이 만들어준 목표는 항상 공허감만 낳는다. 이것은 나의 경험으로부터 관측된 현실이었다.


어쩌면 남들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실패를 겪어본 경험이 많지 않다. 대학도 내가 원하던 곳 이상을 가게 되었고, 많은 경험은 현재까지도 많은 인간관계를 꾸준히 유지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관계 맺기에도 도움을 주었다. 즉 현재의 상태를 보아서는 우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결과로써는 좋지만,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살아왔다. 노력을 함에 있어서도 남들에게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쩌면 낮은 실력이 나를 무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왔다. 친구들, 연인도 마찬가지로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상대방이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없는 척 살아왔던 것 같다. 덕분에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성과를 내도 불안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이 관계가 무너질까 두려움에 오히려 손아귀의 많은 모래들을 놓쳐 왔다.


하지만 방향을 보고 바라보는 삶. 철학이 있는 삶에서는 이게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싫어하는,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내 방향을 확고하게 설정한다면 과정은 경로의 대부분이고, 결과는 그저 경로의 마지막일 뿐이다. 99%의 있는 그대로의 과정을 무시하고 1%의 결과를 바라보기보다, 나는 내 인생의 99%를 솔직함과 충만함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문제에만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해서, 자기 자신의 줏대 없이 흔들리고 '방황한다고 평가되는' 인생을 살지 않고, 내 나름의 선택기준과 방향에 확신을 가지고 '울지 마 톤즈'처럼 내 신념의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인생을 산다면, 출산율 자살률 그리고 나아가 철학이 없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부작용들(생산성의 최대화가 아닌 복수와 증오, 악플, 나락문화)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방안이다. 삶을 살아오면서 남들의 시선 보면 지옥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이를 무시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 해결방안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필자의 현재로서의 권유는 '글'과 '소통'이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많은 선호와 자기 스스로의 감정이 담겨있지만 이를 바로 알아차리는 메타인지능력은 사람에 따라 천지 차이이다. 나 또한 이러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꾸준히 느껴왔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글을 통해 내 의견을 남들에게 공유하고 또한 소통하려 한다. 글은 생각보다 내가 가진 마음을 반영하기 좋고, 소통이라는 수단은 비록 약간의 가식을 글 속에 첨부하지만, 솔직함을 조금씩 늘려간다면, 단순히 마음에서 맴도는 메아리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 같다. 간단하게는 지인이나 GPT등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누군가의 시선은 두려움도 있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앞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기의 목표나 성과가 아닌 바라보는 방향을 듣고 이를 위한 궤적을 들여다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도 잘못된 사람은 없다. 바라보는 방향과 이를 위한 실행만이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면, 조금 더 다채로운 세상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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