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동네에서 태어났던 나는, 참 고집이 센 아이였다. 어릴 적 누군가가, "어머 여자애니? 귀엽네"와 같은 말을 나에게 하면 나는 "저 남자거든요? 그리고 저 안 귀엽거든요?"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을 쳤더랬다. 어릴 적의 나는, 참 끼가 많았다. 어린이 집에서 하는 행사에서 항상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유치원에서는 연극에 열심히 참여하는 등 나는 항상 자신감과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초등학교에서는 오히려 조금은 적응을 못 했던 것 같다. 1, 2학년 때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소 강한 성격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고, 조금은 주춤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3학년 5학년 때에는 그래도 조금 잘 적응해서 반장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물론 어딜 가서나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고,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이나, 집안에 돈이 많아 생일파티를 거하게 하는 친구들에게는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기도 있었다.
중학교 때의 나는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지방으로 6개월간 다녀오기도 했다. 발령을 받았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미안하지만 함께 지내자고 말하셨고, 아버지는 능력은 좋으셨지만, 직장 내의 시기질투 등으로 인해 결국 직장에서 해고당하시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어릴 적의 나는 아버지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중학교 2학년에 다시 돌아온 서울의 같은 중학교에서 나는 적응에 힘들어했고, 다시 중학교 3학년에는 많이 회복했지만, 참 그때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정도로 나이가 차지는 않았더랬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으셨다. "미국 여행 가지 않을래?" 사춘기이자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그때 까지도 다시 직장을 잡지 못하셨지만, 내 마음속에는 원망 만이 가득했다. 내가 아빠 때문에 내려가지만 안았어도 학교에서 더 잘 적응했을 텐데. 와 같은 생각 때문이었을까. 집안이 위태롭다는 그런 걱정보다는 원망이 더 가득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선뜻 내민 제안을 나는 바로 잡아챘다. 나이가 든 지금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의 나는 그리 생각이 깊지 않았다.
우리 집은 친척이 미국에서 있었기 때문에 미국 여행이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후일담을 듣기로는 아버지가 숙식비를 많이 제공했다고는 했지만, 어릴 적의 나는 그런 것까지 알지는 못하였다. 생에 첫 미국 여행을 갔던 나는 참 맘에 안 드는 것이 많았다. 물론 사춘기 시절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때의 나는 아버지가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내 평화롭던 삶을 흔들어 놓은 존재였다. (그 예민한 중 2의 나를 지방에 보냈다가 6개월 만에 돌아오게 했으니) 여행을 다니면서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코골이에 잠이 들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노래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기 때문에 노래를 다운로드하여 작은 mp3 재생기에 넣고 다녔다. 그때 다운로드한 사이트가 외국이라 100곡정도를 다운받았었는데 당시 들었던 노래가 Eminem의 Mocking bird, sara bareilles의 gravity와 같은 것들이었는데 아버지의 코골이를 타파하기 위한 나의 해결책이었다. 조용히 이어폰을 귓속에 끼고 잠들던 날들은, 불안했던 내 감정을 조금은 잠재워 주었던 그런 노래들이었다.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시간을 내서 찾아간 여행에서 늦게 일어나는 내가 맘에 들지 않으셨다. 나는 코골이를 주구장창 하면서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며 다그치는 아버지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특히 아빠가 영어도 잘 못하고 잘 못 알아들으면서 아는 척하는 게 보기가 싫었다. 아버지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반면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를 소개해주는 버스를 탈 일이 있었는데, 나는 아빠가 영어도 잘 못하면서 자기 얘기를 막 하는 걸 보면서 너무 쪽팔린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아빠가 잘 못 알아들을 때는 내가 번역해주기도 하면서 아빠를 핀잔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마디를 못했다. 입 안에 머문 단어들을 말하는 데에는 참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급하게 화장실 갈 일이 아니었을 때는 항상 아빠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때 내가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지만, 자신감 있게 말하는 아빠가 부러워서 나는 아버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험담했다. 그때는 그게 나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여행은 한 달 정도의 긴 기간이었다. 아버지의 코골이와 미움으로 시작되었던 여러 감정들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경험시켜 준다는 생각을 뒤로한 채 불만을 쌓아가게 했고, 점점 아빠가 더 미웠다. 참 어렸던 생각이었다. 어느 날 뉴욕 스테이크하우스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3~4만 원이 넘는 외식은 하지 않았었고, 아빠가 가끔 나에게 그런 곳 갈래?라는 말을 할 때에도 나는 우리 집안의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생각에 가고 싶어도 가기 싫다고 했다. 아버지는 본인이 봤던 스테이크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면서 꼭 가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나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가고 싶으면 나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때도 자존심을 부렸었다.
스테이크의 가격은 정말 비쌌다. 당시 내 용돈이 한 달에 12000원이었는데, 스테이크 하나 가격이 최소 10만 원 이상이었다. 아빠는 자기가 먼저 고르겠다면서 서로인 스테이크를 시켰다. 이미 10만 원이 넘는 가격에 나는 처음에 같이 나눠 먹자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고르라고 제안했다. 나는 잘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아빠는 웨이터를 불러 어떤 게 맛있냐고 조언을 구했다. 립아이 스테이크가 맛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그걸 시키셨다. 내 눈앞에 20만 원이 넘는 스테이크 두 조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정을 대충은 알았던 나는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똘똘 뭉친 나의 자존심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그런 것 따위 알 바 아니라며 한 입을 베워 물었다.
너무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너무 미안했다. 거의 일주일을 투덜대던 내가 생각났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무게와 고통을 알면서도 내 아픔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나 자신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났다. 아빠는 왜 맛있는 걸 먹으면서 우느냐고 물으셨다. 자존심 강하고, 원망 많았던 나는 그냥 너무 맛있어서라고 답했다. 많은 내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까지 내가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항상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유쾌하게, 그리고 조금은 담담하게 내 삶을 응원해 줬던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원망만 가득했던 사람에게 그 원망의 제공자가 나에게 베푸는 순수한 나를 위한 행동들은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그게 사랑이라고 나는 느낀다.
아버지와 갔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아버지는 말하셨다. 아버지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겠다고 하셨다. 나는 서울대에 들어가서 MIT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집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아니어도 아버지 상황은 많이 좋아졌고, 나는 서울대는 아니어도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유학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서사가 항상 완벽할 수는 없지만, 나의 마음속에 한편에는 항상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위해 지원해 주었던 사랑이 남겨져 있다. 언제나 내가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게 만드는 가족과 사랑을 가장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