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리픽싱의 명과 암

by 제이순

투자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 한 문장이 오래 맴돈다.


“실적 기반 리픽싱을 걸겠습니다.”


당장은 마음이 가벼워졌지만, 그 말의 후유증을 아는 사람에겐 더 많은 질문이 시작된다. 성장의 약속과 안전장치 사이, 어디에 눈을 둘 것인가의 문제다.

헬스케어 제조기업. 공정과 품질을 설명하는 눈빛은 또렷했고, 팀은 성실했다. 다만 R&D의 시간이 길었고 본격적인 사업화는 아직 출발선에 가까웠다. 매출 전망을 묻자 “파트너는 정해졌고 하반기부터 점차 늘어납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성장의 언어는 늘 당당다. “올해는 작년의 2배, 내년은 올해의 3배.” 숫자는 시원하지만, 그 숫자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해선 늘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늘 같은 방식으로 물어본다.


“파트너사가 연구용으로 소량 발주 후 자체 파이프라인에 맞춰 커스터마이즈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요. 대표님이 그리신 판매 수량은 ‘루틴한 양산’에 가까워 보입니다. 올해와 내년의 제조 실적을 정말 그 페이스로 찍어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불가피 하다. 매출은 ‘의지’가 아니라 ‘습관’에서 나오니까.

Pre valuation은 Peer group 대비 높았다. 여기서 회사가 제시한 카드가 ‘실적 기반 리픽싱’이었다. 약속한 매출을 못 채우면 이번 발행 단가를 20% 낮춰 재조정하겠다는 약속. 올해를 달성하더라도 내년 목표를 미달하면 한 번 더 조정하겠다는 조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투자자 입장에선 분명 매력적인 안전장치다. 회사가 잘하면 좋고, 혹시 못 해도 단가가 낮아져 손실을 줄일 수 있으니까.


문제는 3분기다. 다시 통화를 하니, 연간 목표의 절반 수준. 남은 50%를 4분기에 채워야 리픽싱을 피할 수 있다.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에 “예상보다 발주 수량이 빡빡했지만,, 해야죠”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 ‘해야죠’에는 의지와 현실이 겹쳐 있다. 한 번 간신히 맞췄다 해도, 같은 리듬을 내년에도 반복할 수 있을까. 오히려 미달의 확률이 서서히 올라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리픽싱은 단기적으로 고민을 덜어주는 훌륭한 처방이다. 그러나 발동되는 순간부터 다음 라운드의 밸류에이션은 ‘할인된 과거’에 닻을 내린다. 시장은 조정 가격을 기준점으로 삼고, 두 해 뒤 새 라운드의 발행 단가는 결국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투자의 시계는 유한하다. 자산가치가 몇 년간 원가 부근에서 머문다면, 그 시간은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게 낫다.


무엇보다 리픽싱은 이야기의 중심을 슬쩍 밀어낸다. 회사의 본질—시장성, 기술성, 성장성, 지속 가능성, 경영진의 우수성—보다 ‘조건’이 앞서게 된다. '리픽싱이 있으니 괜찮다'는 프레임은, 정작 왜 이 회사가 크게 커질지에 대한 상상력을 갉아먹는다. 투자 포인트는 안전장치가 아니라 엔진에서 나와야 한다. 엔진이 충분히 뜨거워지면 안전벨트는 덤이 되고, 엔진이 식어 있으면 안전벨트로는 멀리 못 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리픽싱이 있든 없든, 이 회사의 매출은 어떻게 ‘습관’이 되는가. 첫 주문에서 반복 주문으로 넘어가는 전환율은 어떠할까 연구용 소량 발주가 양산 루틴으로 바뀌기까지의 체크포인트가 제대로 찍혀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년의 3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파이프라인 하나의 우연이 아니라 여러 고객의 의도적인 습관에서 나오는가.


결론은 담담하다. 리픽싱은 투자 결정을 ‘쉽게’ 만들어 주지만, 좋은 투자를 ‘깊게’ 만들어 주진 않는다. 조건이 아닌 구조, 약속이 아닌 반복, 낙관이 아닌 루틴.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은 ‘리픽싱의 열매’가 아니라 ‘매출의 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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