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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Jul 07. 2023

개들의 섬 (2018)

- 나의 인생에는 반드시 네가 있어야 한다.

감독 : 웨스 앤더슨

출연(목소리) : 브라이언 크랜스톤(치프), 코유 랜킨(아타리), 리브 슈라이버(스파츠), 에드워드 노튼(렉스), 빌 머레이(보스), 틸다 스윈튼(오라클), 쿠니치 노무라(고바야시), 그레타 거윅(트레이스), 넛메그(스칼렛 요한슨), 프란시스 맥도맨드(넬슨 통역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2018년 작품 <개들의 섬>을 보았다. 웨스 앤더슨은 BBC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선에 3편이나 이름을 올린 감독 중 한 명이다. (3편이 가장 많음) 그 리스트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로얄 테넌바움>, <문라이즈 킹덤>을 다 보았지만 독특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는 인정. 그러나 내용상 큰 감흥은 없었는데 이 영화 <개들의 섬>을 보고는 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 이 분, 대단하시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스톱 모션(한 프레임씩 직접 인형을 움직여서 찍는- 상당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애니메이션인데, 디테일이 어마무시하다. 정말 보통의 배짱과 인내심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들은 항상 '특정한 공간'이 중요한 소재가 되면서 자연스레 주제와 연결된다. 그 특정한 공간이 특정한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그 특정한 틀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 할 수밖에 없는 특정한 행동이 주제와 직결되는 형식이다. 이런 자기만의 시그니처를 가지고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 분 웨스 앤더슨을 아티스트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 있으랴.


시대적 배경은 근미래, 공간적 배경은 일본, 그중에서도 고바야시 시장의 관할 안에 있는 메가사키의 쓰레기 섬이다. 그리고 그 섬이 바로 개들의 섬이다. 앞서 출연자를 나열할 때 보셨겠지만 등장하는 개들의 목소리 더빙은 영어권 배우들이 맡았다. 하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 일본이기 때문에 영화 속 인간들은 모두 일본어로 말한다. 영화는 일본어 대화에 자막을 삽입하지 않는 패기를 보여주는데 동물과 인간의 대화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소통의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다만 일본인이나 일본어 잘 아는 사람은 영화를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면 남도 좋아해야 하고, 자신이 싫으면 남도 싫어해야 하는 사람.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인 고바야시 시장이 딱 그런 사람이다. 고바야시 가문은 대대로 고양이를 좋아해서 개를 미워했는데(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왜 개를 미워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급기야 개독감, 여러 전염병, 개가 인간에게 해를 가한 일 등을 이유로 삼아 모든 개를 쓰레기섬으로 내쫓아 버리는 것이 영화의 발단이 된다. 선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대중들이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고바야시 시장의 정책대로 가족으로 여겼던 반려견을 쓰레기섬으로 보낸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고바야시의 먼 친척이었다가 양아들로 입적된 아타리 고바야시와 미국에서 유학 온 여고생 트레이시이다. 아타리가 자신의 경호견 스파츠를 구하러 홀로 경비행기를 타고 쓰레기섬에 도착함으로도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거의 대부분의 개들이 사람의 가족으로 여겨지며 살다가 이곳으로 보내졌지만 떠돌이개인 치프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에게 버려졌음에도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반려견들과는 달리 치프는 인간에 적대적이고 인간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스, 렉시, 킹, 듀크(반려견이었던, 혹은 인간의 사랑을 받았던)와 함께 다니면서 사건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데 매번 그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자신이 아닌 그들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 스파츠가 이곳으로 보내질 때 작은 철창에 갇혀 보내졌는데 아타리가 그 철창을 찾았을 때는 개의 유골과 스파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이름표뿐이었다. 철창에서 나오지 못해 죽었다고 생각한 아타리는 그 길로 섬을 떠나려고 하는데 개들은 개의 유골이 스파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로 아타리를 설득해 이 섬에 남게 한다. 그리고 스파츠를 찾기 위한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이 보낸 로봇개들과 아타리를 데려가려는 고바야시의 똘마니들에 의해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아타리와 다섯 개는 똘똘 뭉쳐 그들과 싸워 이기고 또 두 마리의 다른 개들을 만나 도움을 얻어 결국 스파츠를 찾는다. 그리고 듀크, 킹, 렉시, 보스와는 달리 아타리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딱히 없었던 치프가 아타리와 둘만 동행하게 되면서 묘한 우정이 생기는데 개샴푸로 처음 목욕을 해 본 치프는 알고 보니 코의 색깔만 다른 스파츠의 친동생이었던 것이다. 또 치프는 넛메그라는 아름다운 여자 개를 만나게 되고 지금껏 봐왔던 개들과는 다른 야성미가 넘치는 치프에게 넛메그 역시 끌린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메가사키도 새로운 흐름이 생기는데, 바로 트레이시를 중심으로 한 고바야시 시장의 개 없는 세상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바야시에 의해 암살당한 과학당의 와타나베 교수(고바야시의 개 추방 정책에 반대했다)가 연구 결과 남겨 놓은 개독감 치료제를 손에 넣은 트레이시는 반 친구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개독감은 치료할 수 있으며 고바야시의 말만 듣고 자신이 사랑하는 개를 쓰레기섬에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당장 이 정책을 멈춰야 한다고 선포한다. 

아타리와 치프는 서로를 아끼는 사이로 발전하고 그때 살아있는 스파츠를 만나게 되는데..

결혼해서 자식까지 주렁주렁 낳고 개들의 섬에서 살고 있던 스파츠는 개들이 당한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어, 아타리의 개인 경호견에서 해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한다. 고바야시 일당과 아타리와 트레이시, 스파츠를 중심으로 한 개들은 최후의 결전을 펼치고 결국 승리한다. 



최후의 결전 중 폭탄이 터질 때 파편이 머리에 박힌 아타리는 뇌수술은 성공했으나 하나만 남아있던 신장이 망가지고, 잘못을 뉘우친 고바야시가 자신의 한쪽 신장을 떼 주어 살아난 후 신임 시장으로 선출되어 개들과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정책을 펼친다. 때로 개를 학대한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하라는 극악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의 파트너인 트레이시가 내조를 잘하면서 조율하고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개가 있고, 개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함께 하는 메가사키가 된다. 또 사람들에게는 몸 바쳐 희생한 영웅으로 기억되어 비석까지 세워진 스파츠는 사실 가족들과 함께 잘 살고 있다. (숨어 살긴 하지만) 그리고 치프와 넛메그의 사랑도 결실을 맺는다. 




이 영화에서 생각해야 할 캐릭터는 아무래도 치프와 아타리일 것이다. 나 아닌 존재에게는 길들여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홀로 떠돌아다녀서 실제 자신의 털 색깔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치프이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며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멋지다. 다수의 개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다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다수결이라는 어쩔 수 없는 원칙 때문에 원치 않게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의 친구가 되었지만 아타리라는 한 개인을 만난 후 인간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그에게 적용하지 않는 모습 또한 멋있다. 맘에 드는 이성에게 솔직하게 다가가는 모습 또한. 자신이 떠돌이개라는 것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로 다가가 결국 사랑을 쟁취하는 치프. 

치프가 아타리의 경호견이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다. 아타리라면 그의 경호견이 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떠돌이개로 살아왔으므로 앞으로도 떠돌이개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 곁을 떠나 떠돌이개로 살아온 것도 그 자신의 선택이었고, 앞으로는 아타리라는 한 사람의 충실한 경호견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삶을 살기로 한 것도 그의 선택이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것의 행복을 알게 된 치프는 지금껏 고수한 라이프 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꾸고 진정한 행복을 선택한다. 


친부모를 잃고 현재 아버지인 고바야시 덕에 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전적으로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아플 때, 항상 자신의 곁을 지켰던 건 스파츠라는 개였다. 그의 마음을 알아준 것도, 그를 위로해 준 것도 스파츠였다. 아버지가 자신의 개를 버렸다고 해서 그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개를 찾으러 떠날 수 있다. 


결국 삶이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느냐 하는 그것이 그 질을 결정하는 것 아닐까.

충동적으로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고,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언제 가장 행복한지, 나를 가장 아껴주는 존재는 누구인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것을 제대로 알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할 때, 그 앎과 결심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된다. 상황이 원하는 대로 다 갖추어졌을 때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쟁취하기로 결심하면 반드시 내 것이 된다. 



내 삶에는 반드시 네가 있어야 한다!

아타리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결정하고 그것을 쟁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 속에서 새로운 소중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치프라는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지만 그렇다고 스파츠를 잊은 것은 아니다.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에 새로운 삶의 방식과 행복을 찾은 스파츠를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스파츠와 함께 할 때 행복한 나였기에 스파츠가 원하는 행복을 생각하게 된다. 스파츠가 그의 가족과 함께 그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그와 헤어진다. 나의 행복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치프가 스파츠의 대용품은 아니다. 치프는 스파츠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와 함께 하며 여러 일들을 겪으며 그 역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스파츠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치프를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할 수도, 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사랑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웨스 앤더슨 감독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어서 때마침 상영 중인 그의 신작 영화를 보려고 티켓을 예매했다. (극장이 없어서 멀리 간다) 그리고 <프렌치 디스패치>도 보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다. 당분간은 웨스 앤더슨 감독님 작품 리뷰가 올라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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