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이 있어야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법
감독 : 웨스 앤더슨
출연 : 제이슨 슈왈츠먼, 스칼렛 요한슨, 톰 행크스 등등
웨스 앤더슨 감독의 2023년 작품, 그러니까 현재 상영 중인(하지만 개봉관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보았다. <개들의 섬>을 너무 재밌게 봐서(그리고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서) 감독의 이름으로 검색을 하다가 신작이 상영 중이라는 것을 알고 후다닥 다녀왔다. 하지만 개봉관도 너무 없고, 있어도 시간대가 안 맞아서 겨우 봤다는. <개들의 섬>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는 꽤 난해해서 이해가 되어야 재미를 느끼는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리뷰를 쓸 텐데 하면서 한 주간 틈틈이 생각을 해봤다.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사실 영화 막바지에 등장인물들이 합창으로 반복하며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꿈이 있어야 깨어나지!"
정확한 워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맥락이었다. '반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주제와 직결되기 마련인 것. 그렇다면 이 대사가 말하는 본질은 무엇일까. 영화는 이 대사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한 주간 생각을 했다. 내 생각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픽션이 리얼리티를 풍요롭게 한다'이다.
'애스터로이드'(asteroid)는 '소행성'을 뜻한다. 영화의 제목이 애스터로이드 시티인 것은 소행성이 떨어진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소도시가 배경인 탓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영화 속에서도) 리얼리티가 아니다. 콘래드 어프(에드워드 노튼)라는 작가가 쓴 희곡의 배경인 가상 도시이다. 영화는 이 연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연극의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어기 스틴백(제이슨 슈왈츠먼)인데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못한 네 아이의 아빠이자 전쟁 사진작가이다. 장남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과학 영재로서 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열린 주니어 스타게이저 대회에서 입상했기에 시상식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소행성의 날'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실은 어기는 우드로를 제외한 어린 세 딸은 처가에 맡기고 이곳에 오려고 했다. 아내의 죽음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가 너무 두려워 장인 스탠리 잭(톰 행크스)에게 떠넘기려 했고, 전쟁 사진작가인 자신이 아이들을 다 돌볼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미리 오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장인이 아이들을 데리러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오게 된다. 그리고 우드로 외에 대회 입상한 학생 네 명과 그 부모가 연이어 이곳에 오면서 일시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거기에 천문학자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 초등학교 학생 몇과 담임선생 1명, 이곳의 주민들 몇, '소행성의 날'에 참여하기 위해 온 그리프 깁스 장군(제프리 라이트)과 몇몇의 군인이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아주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소행성'을 가지러 온 '외계인'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외계인'의 존재가 발설되지 않도록 군인을 보내 목격자들을 회유하지만 어른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어거지로 무마하려고 했고 거의 그렇게 되는 듯했는데, 소행성을 가져갔던 외계인이 다시 돌아와서는 도로 내려놓고 가면서 두 번이나 우주선, 외계인을 목격하게 된 사람들을 '국가' 조차도 막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소문은 일파만파 퍼지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유명 도시가 된다.
그 와중에 어기는 디나(수상자 중 1명)의 엄마이자 유명 배우 밋지 캠벨(스칼렛 요한슨)과 야릇한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엄마의 죽음을 아이들의 방식과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어기의 세 딸과 외할아버지 스탠리 잭은 아웅다웅하며 딸(스탠리의)의 뼛가루를 가져가지 못하고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모텔 길바닥 모래에 묻는다.
그런데 어기 역할을 맡은 배우 존스 홀(제이슨 슈왈츠먼)은 대본의 흐름, 대사 중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작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연출가 슈베르트 그린(에이드리언 브로디)과 실랑이를 벌이고, 동료 여배우와 대화를 나눈다. 콘래드 어프는 연극의 대단원을 마무리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집단으로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고 깨어난다는 설정을 넣겠다고 하는데 존스 홀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존스 홀을 포함한 배우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친다.
"꿈이 있어야 깨어나지!"
그리고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모였던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몰려왔던 관광객들도 사라지고 예전의 애스터로이드로 돌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현실의 작가가 쓴 대본을 무대에 올린 픽션이 이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것이다. 이 연극 속에서도 '밋지 캠벨'이라는 배우가 등장함으로 현실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준다. 거기에 '외계인과의 조우'라는 완벽한 판타지를 삽입함으로써 픽션 안에 픽션이 중첩되게 한다. 아무것도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없다. 리얼리티 인물인 콘래드 어프도 완전히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 대사를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그냥 이랬으면 좋겠다. 이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집어넣는다. 연기를 하는 존스 홀도 작가와 감독에게 이해가 안 된다고 어필해 보지만 결국 이해가 안 된 상태도 대사를 읊는 것이다.
외계인과 조우하기는 했지만 찰나의 조우 후 그는 다시 자기 행성으로 돌아간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했던 이곳은 다시 조용한 소도시가 되었다. 함께하는 미래를 그릴 법도 한 어기와 밋지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해서 이전의 일상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사는 우리는 이 리얼리티의 고단함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픽션을 찾는다. 만들어진 이야기(콘텐츠)만이 휴식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 예상에 없었던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도 우리는 지루하고 고달픈 일상의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다. 리얼리티가 리얼리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픽션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픽션이 우리의 리얼리티를 다채롭고 멋진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리얼리티를 사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꿈과 같은 일을,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을 경험한 것 자체가 나의 리얼리티에 변화를 준다. 머릿속에 생각으로 있는 것을 직접 해보며 만들어가는 것을 현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므로 꿈이 있어야 깨어난다.
영화를 막 봤을 때는 '개들의 섬'이 낫네 했는데,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매우 철학적이고 참으로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완벽주의자 스타일리스트의 리얼리티는 어떨까. 이런 사람에게도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픽션'이 '회피처'가 아닌 '휴식처'가 될 때 우리의 '리얼리티'는 우리가 꿈꾸는 픽션에 가까워질 것이다. 지루하고 고단할 때 꿈으로 와서 쉬었다 가자. 쉬었다가는 다시 리얼리티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