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학교

두 개의 세상

by 영영

며칠 전,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분을 만났다. 아이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요즘 아이들 스마트폰 사용이 아주 심각하다고, 특히 SNS 사용이 그렇다고 이야길 들었다. 그리고는 학군에 따라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걷는지 아닌지가 나뉜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선 꽤 불쾌했다. 판이하게 달랐던 (핸드폰을 걷지 않았던) 고등학교와 (핸드폰을 걷었던) 중학교 때가 생각났다. 아이들은 환경에 따라 어른들에게 판단됐고, 그것에 따라 대해지고 있었다. 아이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니까 꽤 많은 것이 달랐는데…


중학교 때는 수업을 좀 빼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학생회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행사들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빼곤 했다. 고등학교 땐 그런 게 없었다. 안 됐다. 학교에서 시킨 일이었음에도 수업을 뺄 순 없었고, 그래서 ‘일’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름 책임이란 걸 배웠던 때였다. 어떻게든 일만 끝내면 그만인 게 아니라, 내가 해야 되는 일. 수업도 들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는 걸.

중학교 때 친구들은 얼른 학교와 마을을 떠나고 싶어 했고, ‘탈ㅇㅇ’ 같은 신조어들을 만들고 써가며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선생님을 좋아했고, 존경했고, 마을과 학교를 좋아했다. 커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들도 했다.


중학교 때 수업을 빠지면서 배웠던 건, 교과서 속 지식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거였다. 친구와 함께 빈 교실에서 교장공모제 공청회 때 할 질문을 만들었는데, 그건 교과서에 나와있지 않은, 실전 국어수업이었다. 교복을 폐지하자는 대토론회를 준비했을 때에도 그랬다. 기승전결이 정해진 교과서 속 ‘재미없는’ 토론보다, 진짜로 찬반이 첨예하게 갈렸던, 정말 오만가지 이유로 찬반이 갈렸던 그 토론이 훨씬 유익하고 재밌었다.

고등학교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수업은 뺄 수 없었는데, 그러니까 그런 시간을 통해 ‘책임’에 대해 배우면서, 수업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에 한 걸음씩 다가가면서 수업을 만든 교사의 의도와 계획에 맞게 교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다. 교과서는 딱히 없는 학교였어서, 수업 속에서 이뤄지는 토론이나 발표 같은 것들도 꽤나 재밌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들이 다이나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가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 고등학교에서는 ‘수업’이 정말 중요했다. 믿을만하고 존경할만한 선생님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이 시간들을 잘 소화하는 건, 불친절했다면 꽤나 어려웠겠지만. 선생님들이 오랜 고민을 한 덕에 술술 마음과 머리에 남았다.


같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와 중학교 생활에 대해 짧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는 고등학교 생활을 더 마음에 들어 했던 걸 보면, 개인의 특성이 이렇게 다르구나 싶으면서도, 내게 천국이었던 중학교가 모두에게 그랬던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예쁨과 관심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선생님들은 자신의 시간을 내게 많이 써 주었고, 선생님들끼리 이야기하며 내 진로를 함께 고민해 주었다. 고등학교 진학 때에도 정말 많은 도움과 응원을 받았었다. 그걸 너무 뒤늦게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모든 친구가 나처럼 중학교를 좋아하진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아 나 되게 재수없는 애였구나.


어떤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이 (지금 있는 환경보다)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길 바란다. 그래서 수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주고,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런 관심과 도움이 모든 학생에게 닿지 못하는 건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을 충분히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수업을 치열히 준비하고 아이들이 이 수업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게 여러모로 돕는다.

중학교 친구들이 학교와 마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건 은연중의 대우를 스스로 알지 않았을까. 그건 고등학교 친구들이 대체로 학교를 좋아했던(애증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차이가, 강한 불쾌감이 든다.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 모르게 그 아이들을 어떻게 치부하는지에 따라, 아이들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를 믿고 있는지, 통제하려 하는지. 아이들이 배움이 짧아 그것을 해석해 내고 표현하진 못하더라도 분명 알고 있을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이 모르게 구분지어둔 그 틀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난다.

이제 아이들은 나와 다른 어떤 아이들이 있는지 모른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은 맞벌이이거나, 한부모거나, 조부모나 친척과 산다. 그래서 하교 후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학원에 가거나 집에 혼자 있는데, 그 집엔 책 한 권이 없다. 아이들이 할 거라곤 함께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것뿐이다. 마을엔 청소년이 안전하게 놀 공간들이 마땅히 없다.

방과 후 마을에 마땅히 공부할 곳이 없어서, 학생들이 직접 도의원에게 편지를 써서 방과후 공부할 공간을 마련했다.


다른 어떤 아이들은,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닌다. 집에는 어른이 항상 한 명은 있다. 집엔 다양한 책들이 많이 있고, 마을엔 다양한 활동을 할 공간과 지원해 주는 어른들이 있다. 스터디카페가 정말 많다. 한 달에 십수만 원 하는 걸 맘 편히 다닌다.


내가 아는 이 차이들을, 다른 어떤 아이들은 ‘공부방’ 따위의 것으로 이 격차를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상상해 보는’ 꽤나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이 수업에 친구들은 오늘날의 계층 문제에 대해 ‘공부방을 만들자’라는 결론을 냈고, 선생님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꽤나 많이 불쾌하다. 다들 알고 있으면서, 왜 짐짓 모른 척하는 거지? 내 아이가 페미니즘에 반감이 없고(나중에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대안학교를 다니는 이른바 ‘진보적’ 남자아이들과도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환경과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으면 진보적 어른이 되고 진보적 사회가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중학교 때 친구들의 일상 용어가 김치ㄴ, 된장ㄴ 였다. 극우 사이트를 매일같이 드나드는 친구도, 온라인 도박에 빠진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들을 계속 같은 자리에 두고, 내 아이만 ‘진보적’ 시각을 갖게 하면 되냐는 말이다. 그것이 과연 진보인지도 모르겠고.


이 불쾌함은 사실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한데, 그런 환경에 지쳐 도망간 것이기도 했다. 처음엔 무균실 같은 학교가 좋았다. 페미니즘 책을 읽는 동아리가 있는 학교, 사회참여를 열심히 하는 학교.

어디선가 종종, 우리가 더 나은 논의를 하자면서 무균실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들이 보인다. 속상하고 화가 난다. 서로가 보이지 않아서 서로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서 애시당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쪽’의 논의들은 막 막 뻗어 나간다. 이론과 논리들이 탁월하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만 남았다.


계엄을 무지성적으로 비호하는 젊은 세대들에 대해 겁을 먹은 어떤 사람들은, <내 아이를 구출해왔다>와 같은 글을 쓰며 기를 써서 해결책을 찾아본다. 그리고는 학교 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진보적 유튜버가 많아져야 하며, 논술과 토론 같은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입시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민 끝에 밝혀낸다. 자신의 아이가 차마 극우가 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교수 부모는 아이에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 논리와 경험으로 아이의 생각을 바꿔놓기에 이른다.

이준석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에게, '공개 석상에 나와 토론하자'라고 제안했고, 실제로 토론이 이뤄졌다. 오세훈 역시 기자들을 불러놓고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하시라'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이 행한 것은, '논리'라는 무기로, 실재하는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가려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두 사례(아이를 극우로부터 구출한/이준석과 오세훈의 전장연에 대한 대응)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차치하고 논리적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더 이상 무용하다고 느낀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이 부조리를 용인하고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오늘의 논리대로 오늘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어떻게 부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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