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
심야식당에는, 어느 곳에서도 환대 받지 못하는 이들이 찾아온다. 야쿠자나 윤락업종사자, AV배우, 제자의 엄마와 불륜관계에 있는 가정교사등등.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들도 많지만, 기억에남는 것들은 대개 어두운 밤에야 식당에 찾아올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심야식당의 모든 이야기들은 인간적이다. 누군가를 통해 들었을 때 눈살이 찌푸려질 법한 이야기도, 심야식당 안에서는 ‘그럴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흘러나오는 과정은 늘 같다. 누군가 식당에 들어오고 항상 먹던 음식을 주문한다. 마스터라 불리는 주인(이름은 아무도 모른다)은 음식을 내놓는다. 그리고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하루살이에 지친 이의 푸념을 묵묵히 듣는다. 정말, 표정하나 바뀌지 않으면서 묵묵히 듣는다. 무뚝뚝하다 못해 나는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한 관조적인 표정으로.
어쩌면 우리는 매주 한 번 정도, 저녁 한 끼 정도는 심야식당에서 하고 싶어 할 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원하는 대로 요리를 해주는 식당에서 밥을먹으면서 주저리 주저리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멋져 보이면서도 특별한 일이니까. 맛있는 밥을먹는 것은 쉽지만, 내 이야기를 속 시원히 펼쳐놓을 수 있을 때는 별로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 식당 밖을 나서자마자, 다른 이의 이야기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내일을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말이다. 몇 시간 뒤, 그러니까 내일쯤이면 우리는 어제 들었던 누군가의 푸념에서 조금 변주된 한탄을 다시 들어야 한다. 우리는 또 믿을만하다고 평가하는 누군가에게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퍽퍽한가 자랑할 것이고. 그렇게 자조 섞인 고민을 주고받으면서도 상대방의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정 있는 사람’ 쯤 될까. 뭐 그렇다.
그놈의 정은, 아마 상대방이 해결해줄 수도 없는 일에 잠언집에 나올 법한 말들을 곁들여 해주는 위로 정도로 대변된다. ‘시간이 약이다’, ‘망각은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이다’와같은 맥빠지는 말이라도 해줘야 직성이 풀린다. 듣는 이도 참된 해결책이 아닌 어떤 믿음직한 이의 몇마디만 필요했던 것이므로 위로가 유효한가는 따지지 않아도 별 상관 없다. 한숨과 눈물이 뒤섞여 부풀려지기도 하고 잘려나가기도 한 이야기와 정 많은 이의 위로를 안주 삼아 음주를 한 다음 날 속은 쓰리겠지만 말이다. 어제 이야기를 들은 이도 속이 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정많은 이나, 그를 필요로 하는 이나 언젠가 느낀다. 그런 한심한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각한다. 누군가의 푸념을 들어주느니, 적당히 다독여 집으로 보내 혼자만의 시간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을. 또는 누군가의 뻔한 위로를 받느니, 밤새 불편한 잠자리를 고쳐가며 생각을 고치는 불편한 과정을 몇 번 반복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것을. 결국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적당한 관조가 필요한 법이다.
심야식당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택하는 이야기가 있다. 매번 첫사랑이 해주던 문어모양 비엔나 소세지를 마스터에게 주문해서 먹는 야쿠자의 이야기이다. 험악한 인상의 부하 몇 명을 데리고 냉혈한 같은 표정을 한 야쿠자가 식당에 들어와서 문어모양으로 소세지를 만들어주던 아련한 첫사랑을 추억하다니, 기묘한 광경 아닌가. 아마 그는 아련한 첫사랑을, 충실한 부하들이나 몇몇 여자들 사이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며 추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몇 번 정도 그랬을 것이고. 그럼에도 그가 심야식당을 찾아와 말 한마디 없는 마스터를 찾는것은 그의 무뚝뚝함 때문이다. 그 앞에서 만큼은 과거를 가감없이 뱉어내며 첫사랑의 추억을 음미할 수 있으므로. 그는 이제 적당히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더 반가운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그럴 수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우리도 유난스럽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상태는 관조에 가깝다. 이 때의 관조는, 다들 첫사랑이 있듯이 너도 그럴 수 있다는 정도의 관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게 하나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기억에남는다.
심야식당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츠네키치 스즈키’의 ‘추억’이 흘러나온다. ‘그대가 뱉어낸 숨이 지금, 천천히 바람을 타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 간다’. 아마도 우리가 뱉어낸 숨은 한숨일 것이고, 그것을 적당히 바라보는 과정만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선을 주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리면, 그것으로 됐다. 각자의 한숨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