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없도록 하자』

by ghu


그때마다 그것을 외면할 것인가 구원할 것인가를 수시로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놓일 때마다 나는 이 세계를 향해 쏘아올렸던 유년 시절의 꿈이나 미래 같은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는가를 절감했고, 삶이란 고작해야 자해와 가해의 녹슨 톱니바퀴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란 걸 깨달았다. 인생은 햄이거나 햄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으므로 어느 쪽이든 아쉬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다만 폭발할 듯 팽창된 안개 속에서 자해가 아니라 해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독소적인 순간은 허다했다. 안개는 해로웠고, 햄이 되어 버리는 건 더더욱 해로웠으며, 허무와 무기력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제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모든 허망함의 그늘에 약은 매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누워버렸다.
p.25.




우리는 어째서 웃는가.
그런 물음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약의 표현대로 멍때렸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해답을 구하는 생각 자체가 되지 않을지 몰랐다. 다만 그런 의구심에 함몰될 때마다 나는 알았다. 모르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묻지 않는 질문들, 저마다 속으로 삼키는 의문들이 있다는 걸. 누구라도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해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풀어서 밝힐 수 없기에 우리는 살아간다.
좀처럼 해갈되지 않는, 갈급한 생의 장면들을 나는 갖고 있다. 어린아이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어째서 엄마는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버지는 어떻게 그리도 허무히 죽어버렸는가, 삼촌은, 할머니는……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무엇에도 답할 수 없다. 사라지거나 죽어버린 이들의 마지막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고 다만 정적이었으며, 생의 곳곳에서 마주친 불운과 불행들이야말로 내게는 정적인 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게 역동적이었던 건 단지 그 죽음과 불운과 불행을 뚫고 꾸준히도 달려가는 삶의, 야속하고도 가혹한 시간뿐이었다.
p.186-187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들 죽어버리는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조차 몰랐다. 나를 알았다면 그렇게 죽어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라고 대항하는 마음으로 나는 살아왔으니까. 어린 손자보다 다 큰 아들을 더 사랑해서 그토록 허무히 죽어버렸다면 나쁜 거예요. 라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나는 버텨왔는지도 모르니까. 어느 날에는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어떤 동력이랄까 하는 것이 너무나 바닥나서 나도 자다가 일순간 죽어버렸으면 하는 밑바닥의 심정으로 지내왔다. 삼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대충 살아버려야 하니까. 대강대강, 얼렁뚱땅, 스리슬쩍 생이 나를 그저 지나쳐버리도록 놓아버려야 하는 거니까. 그게 맞는 거니까.
그러나 나는 여기 있다.
p.233-234



생이 죄스럽고 부대낄 때가 있다. 삶을 지탱하던, 언제고 멈출 것 같지 않던, 연료나 동력도 필요치 않아 하던 관성이라는 힘이 일시에 이유를 물을 때가 있다.
힘을 내어 움직일 이유가 무어냐고, 이 세상에는 생의 활성을 고까워 하는 불운과 불행만이 가득한데 어째서 나는 움직여야 하냐고. 구태여 상처를 주고 받으며 고작 얻는 것이 '여기 있음'의 명예뿐이냐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 책은 답한다. "나는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연대의 마지막 기록으로 우리, 여기 없자고 외치겠다." 너의 상실된 인격과 매번 거절 당했을 애착과 응답 받지 못한 울음을 내가 기록하겠다.

지금으로부터 딱 여든 해 전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어느 시인처럼. 우리 같이 해로운 세상을 버리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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