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으로 엉킨 우리의 일상
<주변에 의존하기>
한 장의 종이 위에 사과가 아닌 것은 빼고 오직 사과만을 그려 넣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은 그게 아닌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 가령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의 경계 밖에 내가 아닌 것들이 있다는 말인데, 모든 것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무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오직 나무만을 상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우리가 상상하는 ‘나무’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나무는 없다. 나무가 아닌 게 전혀 없는 나무는 상상할 수 있을지언정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용(龍)은 어떨까? 나무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 ‘나무 그 자체’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나무와 용의 존재 조건은 다르다. 나무는 주변의 다른 것들과 어울리면서 실존하지만 용은 그것조차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과 어울리는 관계’라는 걸 끝까지 밀고가면 나무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동물이라 불리는 용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존재의 조건 뿐 아니라 존재하는 자신도 변화한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흙이나 물과 같은 나무 아닌 것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잎 또한 공기, 빛과 접속하고 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주변이 없이 나무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흙과 물, 공기와 빛 없이 나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나무라는 존재를 말할 땐 언제나 흙, 물, 공기, 빛 등등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순수한 나무’ 자체는 상상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상상 속에서조차 나무는 주변의 다른 것들 예를 들면 그들이 함께하고 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함께 떠오른다는 것인데, 이렇게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에게 의존해 있다. 이번엔 책을 생각해 보자. 책을 만들려면 나무가 있어야하고 나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흙, 물, 공기, 빛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나무를 자르기 위해 벌목꾼이 필요할 것이고 벌목꾼은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므로 농부와 요리사 등이 필요할 것이다. 농부와 요리사 역시 살아가려면 또 다른 존재들을 필요로 한다. 중요한 것은 존재들의 이런 의존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a가 존재하려고 할 때 반드시 b를 필요로 한다면 a와 b는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b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a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니까. 빛이 없다고 가정하면 나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흙이나 물 그리고 공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홀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공기는 어떤가? 이때 공기 역시 다른 존재들과 늘 함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공기 중 사람이 숨 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산소인데 산소는 나무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무는 우리가 호흡하면서 뱉어낸 이산화탄소가 필요하다. 호흡(呼吸)이라는 게 그렇다. 호흡은 공기를 들이 마시고 뱉어내는 순환작용이다. 만약 공기를 들이 마시는 작업 밖에 할 수 없다면 누구든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공기를 뱉어 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려면 반드시 공기를 들이마시고 뱉어 내는 호흡방식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 흙, 빛도 마찬가지다. 간혹 들이마시는 것만 호흡이고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다. 들이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들이 마신 공기를 ‘뱉어 내는 게’ 호흡이고 그게 반복되는 게 살아있는 것이다. 물론 들이 마신 공기와 뱉어 내는 공기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호흡은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뱉어 내는 순환 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호흡기관을 ‘순환기관’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가 흔히 홀로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빛, 물, 공기 같은 것들도 모두 (자신이) 아닌 것들과 함께 존재한다. 만약 빛이 없다면 나무를 생각할 수 없듯, 나무를 비롯한 만물과 함께 하지 않는 빛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든 것들의 의미는 주변과 함께 드러난다. 이것은 특정 사물에 대한 게 아니라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주변과 늘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있을까? 이런 존재방식이라면 나와 주변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넘어, 본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모든 존재를 포함한 그 주변은 ‘······a-b-c-d············ w-x-y-z······’ 같은 연쇄반응처럼 서로에게 의존해 있다. 만약 x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x 바로 옆에 있는 w와 y가 먼저 영향을 받겠지만 따져보면 모두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영향력에서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이 의존은 끝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서로서로에 대한 연쇄반응의 방향성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성은 무한할 것이다. 만일 연쇄반응의 끝이 있다면 가령 a-b-c-d-e-f-g 이렇게 쭉 나가다가 g에서 의존이 끝난다면 g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마도 그때 g는 신(神)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연쇄반응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으로 인하여 연결고리가 시작된다고 여기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강력해서 그 모든 어려움 뚫고 나갈 수 있다거나 혹은 자신의 입지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주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함몰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 그 주위엔 반드시 자신의 주장에 밀려난 존재들이 있다는 말이다. 시 한 편을 보자.
<못을 박으며/최희철>
정침(定針)을 잡아 못을 박는다.
날카로운 힘으로
뚫었다 생각하지만
못은 주변의
함몰과 밀려남 없이
서 있을 수 없다.
너무 헐겁지도
빈틈없지도 않은
세상의 여분이
못을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네 또한 그렇다.
뿌리를 깊이깊이 내리려 하는 만큼
주변이 자기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아니, 꽉 조여 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미움이든.
우린 흔히 못의 날카로움이 벽을 뚫고 못 자신을 벽에 박힐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의 원천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못이 박힌 지점을 자세히 보면 벽의 함몰이 보인다. 못이 아니라 벽이야말로 못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도 이처럼 주변에 대한 의존성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깨달음으로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것이다. 그걸 연기(緣起)라고 하는데 불교의 핵심철학으로 알고 있다. 모든 존재는 연기적 존재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연인관계, 경쟁관계, 거래관계까지 연기란 모든 존재가 이렇게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엔 책상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책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책상은 책상’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설명처럼 여겨지지만 ‘동어반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반복은 아무런 의미를 생성해내지 못하는 ‘동일성의 반복’이 되어 버린다. 책상이 무엇이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상이 아닌 것으로 책상을 설명해야 한다. 책상을 설명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책상 주변에 있는 것들 즉 책상이 아닌 것들을 끌고 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설명이 계속되려면 책상 주변을 연쇄적으로 끌고 와야 할 것인데, 그러다보면 책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세상 아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가져 와야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그런 방식은 사물인 책상 뿐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어쩌면 만물의 존재 방식일 것이다. 그런 존재 방식은 사물에만 적용될까? 사물 뿐 아니라 사건도 그렇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건과 관련된 사건들을 다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조차도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다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건들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작거나 하찮은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도 그럴 것이다. 행복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니다. 행복은 주변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 관계들이 작동하는 힘들에 의해 생성 되는 자기장 같은 것이다. 그걸 배치(配置)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이 배치와 관련이 있다면, 역으로 배치가 행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배치가 구조(構造)가 되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배치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끝없이 변화한다. 같은 행복 같지만 그 행복이 돈과 연결된 사람, 건강과 연결된 사람, 지혜와 연결된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모두 다를 것이다.
우린 가끔 그들의 공통된 ‘행복’ 즉 행복의 원형을 찾고자 하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행복의 원형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우린 행복의 원형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비교하려고 하지만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알게 될 것이다. 비교란 실체론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비교 당하게 되면 더 많이 힘들어진다.
우리 삶이 주변과 깊은 관계에 있다곤 하지만 의존의 경계는 늘 불투명하며 그게 우릴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모니터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이고 또 모니터인지 알기 어렵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결정하려는 게 실체론이고 또 다른 비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끝없이 이어지며 미세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건 아마도 삶이 미세한 비늘들의 누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다른 일상들. 그런 일상들이 또 다른 일상들과 만나고 다른 시간, 사물, 공간,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게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하여 일상은 실핏줄 같은 잎맥 속에서 때론 투명하게 도드라지기도 하고 혹은 불투명하게 흐려지면서 굽이치는 액체성이 아닐까 싶다. 늘 주변에 의존하면서 이루어지는 자신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