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물리학에 스칼라와 벡터라는 개념이 있다. 스칼라는 ‘스케일’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양적(量的)인 것들이다. 길이, 넓이, 부피 등이 이에 속한다. 양적인 것들은 나누거나 합해도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10미터를 1미터 10개로 나눌 수도 있고, 1미터가 10개 모여 10미터가 될 수 도 있지만 10미터와 1미터는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양적인 것은 이처럼 나눌 수도 있고 합할 수도 있는데 오직 양적인 변화만 있다. 이런 양적인 관계를 ‘일반과 부분’라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양적인 것은 나누거나 합할 수 있기 때문에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셀 수 있다는 말은 크거나 작다 혹은 많거나 적다처럼 서로를 비교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양적인 것들은 ‘정도(程度)의 차이’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칼라와는 달리 벡터로 불리는 개념은 질적(質的)인 것들이다. 속도, 온도, 시간 같은 게 이에 속하는데 이들은 양적인 것들과 달리 나누거나 합할 수 없다. 온도 100℃는 1℃ 100개가 합쳐져서 된 것도 아니고, 100℃를 1℃ 100개로 나눌 수도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100℃와 1℃는 속성이 다르다. 나눌 수도 합할 수도 없기에 셀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크거나 작다, 많거나 적다를 적용할 수도 없다. 그것은 속도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질적인 것들은 질적이기에 그 자체가 아니라 모두 양적인 그 무엇으로 표시되어야만 측정할 수 있다. 가령 온도는 온도를 양적으로 표시하는 온도계(가령 붉은 알코올 막대 길이 따위) 없이는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온도계의 눈금은 온도를 표시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 온도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온도를 셀 수 없는데도 온도계 때문에 온도를 셀 수 있다고 여긴다. 그게 바로 온도를 측정하는 행위다. 하지만 온도 측정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온도의 양적 측정이 아니라 서로 속성이 다른 온도(?)를 표시한 것을 읽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나 속도를 가리키는 속도계 역시 마찬가지다. 10미터와 1미터의 관계가 ‘일반과 부분’이라고 한다면, 온도나 속도 같은 질적인 것들의 관계는 ‘전체와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적인 것 가령 10미터와 1미터의 관계를 보면 10미터는 1미터보다 더 크기 때문에 10미터는 1미터를 함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0℃와 1℃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1℃는 100℃에 함유되는 개념이 아니다. 1℃는 100℃에 속하는 게 아닐 뿐 더러 오히려 100℃가 되기 위한 문턱 역할을 한다. 가령 100℃가 되려면 1℃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즉 1℃와 100℃는 서로 ‘연기(緣起)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1미터와 100미터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1℃는 100℃에 비하면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100℃를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우주에서 통용되고 있는 ‘우주적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주 작지만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체가 ‘전체’이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특이성’으로서의 작은 것 말이다. 1℃와 100℃는 그런 관계다.
여기서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앞에서 우린 양적(量的)인 것들은 나눌 수 있어도 질적(質的)인 것들은 나눌 수 없다고 했다. 이걸 우리 일상의 삶에 적용해 보자. 나이 1살을 100개 모으면 100살이 될까? 100살에서 1살을 빼면 99살이 되고? 그렇지 않음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1살의 속성과 100살, 지금 내 나이인 62살의 속성은 모두 다 다른 것이다. 하지만 우린 1살이 60개면 60살이 되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자. 우린 보통 늘 건강(健康)하거나 또는 앞으로 건강해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지금 62살인 내가 건강해 지려고 한다면 건강의 기준이 되는 지점은 몇 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춘기 시절이 나의 가장 건강한 시절이었을까? 아니면 20살 때? 우린 보통 건강한 시절이라고 하면 어릴 때 혹은 청년기 등과 같은 젊은 시절을 떠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땐 건강했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건강을 잃고 늙어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이를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린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의 삶을 살고 있질 않다. 1살은 1살 나름대로 ‘질적 차이’가 다른 삶이고, 62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62살의 삶은 다른 어떤 시절의 삶을 기준 삼아 건강해 질 수도 없을뿐더러, 그 기준에 비추어 건강하거나 혹은 건강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즉 우리는 결코 지금보다 더 건강해 질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가장 ‘건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까? ‘건강해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같은 맥락에서 우린 병(病)에 걸릴 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도 건강과 똑같은 ‘질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이 가장 ‘건강하고 병에서 걸리지 않은’ 질적 상태라는 말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그런 ‘건강함’이 지속(持續)되는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린 건강해 질 수 있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질적 운동체인 우리의 삶을 공간화 시켜 ‘정도의 차이’ 즉 ‘양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적 차이로서의 삶은 ‘병’이나 ‘건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생명이란 끝없이 새로운 차이들이 펼쳐지는 사건이다. 니체는 ‘건강하지 않다면 병조차 가질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차이들이 펼쳐지는 사건이라는 말은 점점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선형(線形)적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차이를 만들면서 끝없이 질적으로 변해가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삶을 ‘정도의 차이’ 즉 ‘양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노인, 병, 건강, 장애인, 죽음 이런 것들을 모독(冒瀆)할 수도 있다. 가령 노인은 좋은 상태였다가 나빠진 상태가 아니다. 병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상태에서 나빠진 상태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모두 ‘새로운’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린 늘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죽음 역시 새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태어남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의 어떤 위계가 없다는 말이다. 나빠진 것에서 좋아진다든지 좋아진 것에서 나빠진다는 것은 모두 이원론적 생각이다. 실제로 새로운 상태로서의 ‘삶’은 끝이 없을 뿐 아니라 당연히 시작도 없다.
죽음을 생각해 보자. 죽음은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까? 죽음은 태어남과 같은 개념이다. 죽은 자가 다시 죽을 순 없다. 모두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런데 태어남이란 없다고 했다. 태어났다는 말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져보면 우린 없었을 때가 없었다. 가령 내 생일은 1961년 8월 6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럼 1961년 8월 5일엔 난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그보다 10년 전, 100년 전 아니 10,000년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나는 지금과는 다른 아주 미세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완벽하게’ 없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에 없었다가 ‘태어난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태어난 적이 없으므로 ‘죽을 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차이의 반복’이라는 사건이 있을 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이 질적 차이를 반복할 뿐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양적인 것들은 나눌 수 있고 합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누거나 합해도 속성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과연 나눌 수 있거나 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하게 말해서 나누어도, 합해도 속성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누어졌거나 합해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무리 나누어도 혹은 나누려고 해도 나눌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눌 수 있다고 말한 양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양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에서 나눌 수 없다고 한 질적인 것들이 매 순간 나누어지고 합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양적인 것들은 과연 질적인 것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걸 우리 삶에 적용시킨다면 양적인 것들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가정된 체계 속에서만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가령 시간과 시계를 생각해 보라. 시계의 눈금은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질 않다. 우리의 삶과 나이도 그렇다. 나이는 우리의 삶의 상태를 표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우린 시간, 온도, 속도를 비롯해서 우리 삶의 의미를 잊고 그것들을 표시하기 위한 도구에 매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적인 게 바로 ‘물신(物神)주의’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가 왕 노릇을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세상에 과연 양적인 것은 존재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양적인 것이라 여기는 것들은 모두 질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당구대 위에 당구공 3개 있는 것과 4개 있는 것은 그저 당구공 숫자가 다른 양적 차이가 아니다. 당구공이 3개 있을 때와 4개 있을 때의 당구 게임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적 차이가 아닌 질적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생명들은 어떨까? 생명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해 이합집산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질적인 다양한 차이들을 만난다. 그런 질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늘 겪는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이다. 우린 살면서 다양한 인연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 모든 게 양적인 차이들의 만남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질적인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자체에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가치가 숨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면서 맺고 있는 인연들에 의해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지고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가치는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린 끝임 없이 양적 것들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눈이 멀어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건 깊은 허무의 늪일 뿐이다!
우리 삶이 양적인 것들로 가득 찬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게 양적인 게 아니라 질적인 것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우리 일상은 좀 더 쉽게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