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에 대하여>4

공짜에 대하여

by 최희철

<공짜에 대하여>


살아가는데 한 순간이라도 없으면 안 될 것들 즉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모두 공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기 같은 걸 생각해 보자. 만약 공기가 공짜가 아니라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한 순간도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공기와 더불어 물 같은 것도 그렇다. 공기나 물과 같은 물질 즉 자연의 그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이걸 좀 더 확대해 보면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들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보편자로 불리는 신의 사랑 역시 어떤 의미에선 공짜여야 하고 실제로 신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되 그 사랑은 늘 공짜다. 여기서 공짜란 화수분처럼 아무리 퍼내도 바닥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지금 물은 공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먼저 우리부터 많이 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물이 공짜가 아닌 게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 중 하나다. 오늘날 우리는 물을 사서 먹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과 관련해서 공짜여야 하는 게 공짜가 아니게 되면서 물은 좋은 물과 나쁜 물로 나뉘게 된 것 같다. 물론 상황에 따라 좋은 물과 나쁜 물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물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물이기에 모두 좋은 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신의 사랑’처럼 공짜는 무한하게 많아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충만하고 넘쳐흘러야 좋은 것이 아닐까. 공기를 생각해 보자. 공기가 어떤 곳에는 있고 또 어떤 곳에는 없다면 생명체들은 골고루 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공짜라 할지라도 공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호흡기관 때문에 물속에서 살 순 없지만 우리와 다른 방식의 호흡기관을 갖고 있는 물고기들은 물속에서 공기를 얻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다양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공기는 공짜여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공짜들이 주변에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걸 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 하나가 공짜의 특징을 쉽게 잊고 산다는 것이다. 공짜는 우리 삶의 바탕화면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없어져 봐야 그게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땅 위에서 마음껏 공기로 호흡하면서 살다가 물속으로 들어가면 물 바깥에선 우리의 허파로 호흡할 수 있는 그렇게 흔했던 공기가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낚시 바늘에 걸려 물속에서 방금 땅 위로 올라 온 물고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물 바깥으로 나와 봐야 자신이 예전에 그렇게 쉽고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곳이 물속이었고 자신은 지금 그 물속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신이 지금 물속에 있다는 걸 몰랐을까? 이게 어쩌면 공짜에 대한 중요한 관점일 수 있겠다. 아마도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자신이 지금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게 물속에선 잘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다. 물, 공기 같은 공짜 역시 우리에게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다. 그게 공짜이지만 공짜일수록 그렇게 소중한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걸 쉽게 잊고 산다는 것이다. 공짜가 생명의 필수조건임을, 아이러니하게도 공짜였기에 쉽게 잊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게 공짜가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크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너무 흔해 공짜였지만 우리에겐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공짜의 소중함을 아니 한 순간이라도 공짜가 아닌 세상은 우리에겐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우린 지금 공짜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공짜가 아닌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먼저 공짜인 것들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게 누굴까? 그들은 인간이고 더 좁혀보면 ‘자본’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욕망’은 당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려고 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팔아서는 안 될 공짜를 판매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왔던 자본의 ‘당연한(?) 욕망’은 당연한 욕망이 아니라 매우 ‘독특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여기다.

여기서 팔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팔고 사는 것을 ‘매매(賣買) 혹은 교환(交換)’이라 한다면, 매매가 이루어지기 위한 선행 조건이 있다. 바로 소유(所有)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적(私的) 소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소유한 나의 것이 아니라면 팔 수 없기 때문이다. 소유라고 하는 개념이 먼저 당연한 게 되어야만 활발한 매매가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이다. 더불어 소유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배타적인 권리’를 말하는 것이면서, 더불어 ‘처분권’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유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로 확장하면, 소유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된다.


이런 의미들은 앞에서 얘기한 공짜와는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역전된 의미들이다. 그런 소유는 언제부터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에 그것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원시공동체에서는 공동체 내부에서는 교환이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소유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소유물이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튼 소유가 없었기에 공동체 내에서는 교환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유와 교환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공동체 내부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그게 좋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소유가 본래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소유가 허용되는 사회가 되자 교환이 분출한 것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소유와 교환이 분출한 때는 ‘자본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 중 하나가 ‘상품’이다. 물론 상품은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상품’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교환되는 때는 자본주의 시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를 오래전부터 당연한 혹은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어떨까? 어쩌면 아주 독특하고 이상한 체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독특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우리는 당연해야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가장 근본적인 생명으로서의 삶 뿐 아니라, 일상적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상의 삶은 체제 혹은 정치 그리고 경제적 문제 등과 동떨어져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늘 변화하고 변화가 커져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여 우린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소유와 교환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소유와 교환을 위해 일생을 몽땅 바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소유와 교환을 위해 일생을 몽땅 바치는 일을 최고의 성실한(?) 삶이라고 명명하기까지 한다. 지금 물을 사서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지금은 물이 그렇지만 어찌 물만 그럴까. 공기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공기를 물처럼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좋은 공기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곤 하는 게 그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공짜인 것이 없어지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오염(汚染) 때문이다. 예전엔 지천으로 널려 있어 늘 공짜로 접하고 또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실 물을 지금도 공짜로 먹을 순 있다. 부산 사람은 낙동강 물을 그냥 먹으면 된다. 낙동강 물을 공짜로 가져다 먹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천으로서의 낙동강 물은 이미 오염되었다고 생각한다. 낙동강 물을 직접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정수기를 설치하거나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사서 먹는다. 정수기는 물의 낭비가 심하고 생수는 낙동강 물에 비하면 수 천 배나 비싸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친 물을 마시려면 개인은 그런 구조 속으로 접근하기 힘들다. 물 한 잔 먹는데도 엄청난 시간과 자본이 투여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이 만들어낸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수기를 설치하는 비용과 생수를 사 먹는 비용 등을, 낙동강을 깨끗하게 하는데 투입한다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미 낙동강 물에 대한 불신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낙동강 물은 우리가 직접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낙동강 물은 왜 오염되었을까? 물론 우리의 잘못된 생활방식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낙동강 그 자체는 물론 낙동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명체들 즉 자연 전체에게로 고스란히 돌아 왔다.

중요한 것은 공짜인 것을 공짜이게끔 하도록 하는 것과 그 공짜의 범위를 점점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색해 보이는 공짜의 세계를 확대하고 일상에서 더 많은 지점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우리 삶의 질은 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위험해지고 더 각박해지는 것 말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공짜인 것 아니 공짜여야 하는 게 의외로 많다. 공기나 물 뿐 아니라 땅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교육도 의료도 사랑이나 우정도 구빈(救貧)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그런 세상에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공짜가 되어야 할 것들이 공짜가 아닌 세상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세상엔 우울한 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어쩌면 그런 삶의 방식은 참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삶의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의 시스템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들은 더 심각해지고 악화될 것이다. 그리고 공짜를 공짜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시스템은 더 확대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자연계에서 가장 불행한 종족이 되어 있을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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