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에 대하여>3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by 최희철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우리 뿐 아니라 만물이 유한(有限)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한한 것의 특징이 변화 즉 운동(運動)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것은 일종의 ‘실체론(實體論)’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래서 운동(변화)은 유한한 것의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것의 특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유한한 것이야말로 운동하지 않는다. 가령 유한한 것이 운동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그것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운동하지 않고 멈추어 있어야 우리는 멈춘 상태로서의 그것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운동은 유한한 것의 특징이 아니라 무한한 것의 특징이고, 무한한 것은 말 그대로 무한하게 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한한 그 어떤 것을 포착하는 게 쉽지 않기에,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편의상 유한한 범위 내에서 그게 멈춰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의 정체성이나 의미를 포착할 때 사용하는 일상적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세상 아니 우주엔 유한한 게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우주에 유한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엔 영원히 운동하는 무한한 것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게 우리 눈에 별빛이 ‘명멸(明滅)’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은 사실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여태까지 무한하게 운동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별들의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린 변화(운동)를 알 수 있을까? 가령 나는 내 앞에 있는 a가 b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a를 본 나와 b를 본 나는 이미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이건 a와 b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나도 운동에 속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즉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은 한 순간도 운동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주엔 운동 밖에 없고 우리를 포함한 모두는 그 운동 속에 ‘접혀’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운동으로서 스스로 그리고 서로에게 접혀 있다. 무한한 것은 특정 공간 속에 마치 사물처럼 고정되거나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접혀 있으며 그것도 무한하게 접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접혀있음’을 통해 큰 것도 작은 것 속에 있을 수 있고, 깊은 것도 얕은 것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접혀있음’ 역시 운동과 함께 무한한 것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 운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일까? 그건 ‘시작도 끝도 없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게 ‘무한’의 진정한 의미다. 무한함은 셀 수 없이 많거나 혹은 깊거나 길거나 한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의 최대치를 확대한 것일 뿐, 무한은 유한의 최대 혹은 극한값이 아니다. 이때 ‘열려 있음’도 무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운동은 어떤 것일까? 왜 우리 그리고 우주는 영원히 운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운동은 욕망이고 운동하고 있는 우리도 다름 아닌 ‘욕망 덩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욕망이 인간은 물론 생명체만의 특권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오히려 우주에서 ‘생명현상’은 작고도 특이한 현상일 뿐이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욕망 덩어리이고 욕망 덩어리이기에 운동하는 것이다. 이때 E=mc²와 같은 ‘욕망=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작동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무한한 것과는 달리 유한한 것은 아무리 커도(혹은 범위가 넓어도) 시작과 끝이 있다. 즉 열려 있는 게 아니라 닫혀 있다는 말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유한한 것은 반드시 질서가 있다는 말과도 같다. 반면 무한한 것은 질서가 없기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질서를 부여하려고 시도해 볼 뿐이다. 그런데 사실 무한한 것은 질서가 없는 게 아니라 질서가 무한하게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무질서(無秩序)’의 진정한 의미다. 더 나아가 무질서는 질서가 무한하게 많음을 넘어 질서를 끝임 없이 생성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닫혀 있는 듯 보이는 것의 내적(內的) 질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도 내적으로는 질서를 무한하게 생성할 수 있지 않나? 그렇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질서를 무한하게 생성할 수 있다. 가령 자연수 1과 2 사이엔 무한하게 많은 소수점 자리 수들이 있는 것처럼 당연히 그들도 무한하다. 이것은 우리가 무한의 ‘열려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열려 있거나 닫혀 있다는 것은 공간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닫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있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 마치 집의 문을 잠그는 것 같은 상황을 떠올린다. 하지만 무한함의 열려 있음이란 그런 공간의 있고 없음이나 크고 작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열려 있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열려 있음이란 질서 혹은 욕망을 무한하게 생성할 수 있느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크고 작음을 떠나 어떤 것이 무한하게 욕망을 생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무한함으로서(혹은 때문에) 무한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평등하다는 말은 자신 주변의 것들과 평등할 뿐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우주)가 평등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불어 서로가 획일적이거나 동일해서 평등한 게 아니라, 서로가 무한하게 욕망을 생성하기에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서로가 다르기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 평등함으로 인하여 그동안 우리의 어깨에 올려진(사실은 실체론이 어깨에 억지로 올려놓은) 온갖 도그마를 털어내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질서와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질서가 적을수록 혹은 질서가 단순할수록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질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질서를 따라야하기에 자유스럽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인데, 그건 아마도 우리가 질서를 ‘결정(決定)’으로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자. 하지만 ‘결정’을 ‘결정(決定)’으로 보지 않고 ‘결정(結晶)’으로 보면 어떨까? 결정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반짝이는 금광석 같은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런 의미에서라면 오히려 결정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점이 하나 밖에 없는 것보다는 결정점이 무한하게 많은 게 더 자유롭다는 말은 그런 의미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이유는 우리의 결정면이 사물보다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동양의 기(氣)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가령 무술의 고수와 서예의 고수 혹은 요리의 고수들은 모두가 다른 방면의 고수들이지만 기(氣)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등한(?) 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대번에 서로의 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기(氣)들이 뚫고 지나가는 게 평등이고 자유인 것이다. 평등과 자유는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이다. 하지만 우린 평등과 자유를 정반대의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을 분리하거나 반대의 것을 상정할 때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나도 소중하고 내가 아닌 ‘타자(他者)’도 소중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와 타자 역시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무한해야 우리는 욕망을 끝없이 생성할 수 있고 평등해지며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반대로 끝없이 유한해지려고 하면서 하나의 질서에 목을 매려고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무한함이 ‘시커먼 어둠’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은 무서운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라고나 할까. 하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결코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의 바탕화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태계에서 하나의 종이 자연을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구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고 태양계가 은하계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무한은 질서가 무한하게 많은 것일 뿐, 하나의 질서가 다른 질서를 억압하거나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는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빛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에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은 사실 어둠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둠과 빛은 ‘근친상간’의 관계인 것이다. 그렇게 우주는 어머니로서 거대한 ‘통일장(場)’인 것이다. 그곳엔 모든 게 있다. ‘없다’가 아니다.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다. 오직 ‘있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있음’이란 특정 공간 속에 ‘실체적’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있음’이란 ‘작용(作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작용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작용은 늘 자신을 포함한 둘 이상이 되어야 한다. 즉 어떤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작용이다. 이때도 작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둘을 분리하거나 비교하려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 즉 ‘원인과 결과’라는 관점으로 작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용은 그런 ‘인과론’이 아니다. 인과론은 시간을 선형(線形)적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그 선형적 시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일종의 ‘실체론’이다. 굳이 말하자면 작용은 동시(同時)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동시적이다. 무한함 속의 무한하게 많은 질서도 그렇다. 어지러울 정도로 무한한 질서도 모두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운동 속에 접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할 때 우리 매우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을 쾌감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음에도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게 쾌감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더 큰 고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우주는 우리를 더 큰 품으로 안아 준다. 그 모든 착각도 고통도 사실은 우주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양의 자식인 것처럼 우주의 자식이기도 한 것이다. 고개를 들어 우주를 바라보라, 우리가 말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게 바로 무한한 질서로서의 우주다. 그것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다.

토요일 연재
이전 02화<평균값이라 불리는 것에 대하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