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값이라 불리는 것에 대하여>2

평균값에 대하여

by 최희철

<평균값이라 불리는 것에 대하여>



자동차를 타고 1시간동안 100km를 달렸다면 시속 100km로 달린 셈이 된다. 이때 시속 100km는 구간 내 달렸던 모든 속도들의 ‘평균값’ 즉 평균속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자동차가 실제로 달린 실재(real)속도가 아니다. 가령 처음 50km 구간을 시속 90km로 달렸고 나머지 50km는 시속 110km로 달렸다고 한다면 실제론 전체 구간 내에서 시속 100km로 달린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시속 100km라는 평균속도를 얻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 단속을 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이것이다. 특정 구간의 운행 속도들의 평균값을 구해 단속의 기준으로 삼는 것 말이다.

그럼 앞에서 말한 50km 구간에 달린 시속 90km나 시속 110km는 실제속도인가? 그 역시도 특정구간의 평균속도일 뿐이다. 구간이 아무리 좁다고 하더라도 모든 구간 속도의 값은 그 구간의 평균속도일 뿐이다. 우린 이렇게 늘 평균속도의 값밖에는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평균속도로 시속 100km를 달렸다고 하지만 실제론 시속 100km로는 한 번도 달려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무한분할하려고 했을 때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선(線) 혹은 궤적을 무한분할하면 동일한 값들을 갖는 ‘부분’으로 되는 게 그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原子)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처럼 무한분할하면 우리는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동일한 그 무엇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무한하게 잘려진 작은 부분들은 모두 동일한 것들이 된다. 이때 평균값에서 ‘동일성(同一性)’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구불텅구불텅하게 굽은 선도 무한하게 분할하는 순간, 굽은 선이 아니라 직선이 되고 직선 중에서도 동일한 값을 갖는 무한하게 잘린 동일성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평균값이 갖고 있는 의미다.


굽었던 것들이 펴져 평균값이라는 직선이 되는데, 분할된 동일성들은 전체로 불리는 일반과 질(質)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자동차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굽은 길을 달려 왔지만 평균속도가 모든 ‘특이성(特異性)’들을 가감(加減)하여 동일한 속도의 값으로 만드는 것처럼. 이게 평균값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인데, 특이성이 모두 무시되고(?) 동일성이 되는 순간이 바로 ‘평균값’이고, 평균값이 탄생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전체를 대표하는 값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금(金)처럼!


우리는 특이성은 보질 못하고 동일성으로서의 평균값만 보이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특이성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비정상(非正常)’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그때부턴 특정 구간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평균값이 정상이 되고, 특이성으로서의 실재 값은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없었던 것으로도 취급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동차의 속도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고등학교 때 착한 학생이었다’는 평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 역시 속도와 마찬가지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주변 관찰의 평균값이다. 실제로 내가 고등학교 시절 착하게 살았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착하다’고 판정을 받은 것이다. 속도와 마찬가지로 나의 고등학교 시간을 더 쪼개도 그런 방식의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균값은 나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보다는 나의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는 관점일 수 있겠다. 가령 ‘착하다’고 인정되는 외부로부터의 객관적 관점 말이다. 나의 외부에 어떤 틀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행동은 그 ‘객관적 외부의 관점’에 의해 판정된다. 실제로 일어난 삶들의 값을 모아 ‘1/n’한 값이 평균값인 줄 알았는데, 평균값이란 어쩌면 실제의 삶과는 상관없는 혹은 실제 값이라 불리는 우리 삶보다 초월해 있는 어떤 관점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평균값의 관점으로 실제 값을 판정하는 것은 물질적 세계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다. 사실 물질은 그렇게 다룰 수 있고 다루는 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착한 학생’이었다는 관찰은 나의 외부에 관점의 틀이 먼저 있고 그 관점의 틀에 나의 실질적인 고등학교의 생활이 끼워 맞추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균값은 실제 값에 대한 우위를 먼저 점거하고 있었거나 혹은 그런 이유 때문에 폭력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균값에는 이미 우리 삶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할하는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에 길들여져 잘 느끼지 못하며 살았던 것이다.

축구 경기도 그렇다. 다양한 축구 전술과 운동의 사건들 그리고 묘기에 가까운 축구 기술들이 보여 지지만 결국은 몇 골을 넣었느냐 하는 것으로 한 판의 축구 경기는 판정 난다. 실제 축구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음에도 골을 넣었다면 그 경기는 골을 넣은 팀이 이긴 경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땐 축구경기를 했던 선수들 뿐 아니라 감독과 코치 그리고 경기장에서 혹은 TV로 그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경기를 졌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구 경기의 하드웨어를 보러 간 게 아니라 하드웨어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으로서의 축구경기’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축구에서의 점수 혹은 그 점수로 경기를 판정하는 것은 ‘사건으로서의 축구경기’를 ‘사물화’하는 것이다. 축구경기는 하드웨어들이 만들어내는 사물화 된 평균값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사건이 사물화 되는 과정을 잘 알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특정 정당을 지지한 500만 표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지지자들 각자가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갖고 지지한 표들임에 틀림없지만 ‘특정 정당을 지지한’ 평균적인 집합적 ‘표’로 간주된다. 그 평균적 지지들로 대결을 벌이는 게 오늘날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장(場)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 정치란 어찌 보면 그런 동일성을 모으려는 시도로서의 정치일 수도 있다. 특정 정당들이 모은 평균값이 얼마나 더 많으냐 하는 물질세계의 척도 말이다.


그런 이유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라는 게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비록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하더라도 그게 우리 삶을 미세하게 반영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평균값이라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정치에서는 사람들이 삶이 잘 발현될 수 있는 대의정치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시스템 자체가 특정한 세력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는 것일 수 있으므로 그런 시스템을 유지하거나 혁파하려는 게 오늘날의 현실적 정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의 모든 영역에서 평균값이 실제 값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 과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값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도 혹시 실제 값이 아닌 평균값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실제 값이 아니라 평균값이 당연하다는 심지어 오직 평균값만이 우리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 주는 값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린 분명 실제 값으로 하루하루 아니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려고할 때 어쩔 수 없이(?) 평균값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어쩌면 거의 동물적 감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의 삶이 평균의 삶으로 되는 게 때론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다행이다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억울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삶을 평균값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가 더 올바른 삶을 사고 있느냐를 떠나, 평균값에 대한 자신의 실질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사회적 평균값이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평균값을 따라가려는 ‘모순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자신은 지독히 혐오하고 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혐오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고통은 어떨까.


그럼에도 평균값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표현될 수 있을까? 단언하건데 없다. 상대적으론 평균값들의 강도가 다를 순 있겠지만 모든 표현은 평균값일 수밖에 없다. 그걸 인정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평균값은 ‘내용에 대한 표현’으로서 우리 삶의 편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평균값이 실재하는 우리 삶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은 결코 평균값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걸 잊게 되면 우린 정말 ‘쇼 윈도우’ 속에서 삶을 살 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평균값으로 표현되지만 매 순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결코 평균값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니 평균값으로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하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삶의 의미이고 어쩌면 정치적 힘일 수도 있겠다. 그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평균값으로 표현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만연할 때 우리는 박제(剝製)가 될 것이다. 박제는 그야말로 평균값의 극치처럼 보인다. 남에 손에 생포되어 벽에 걸려 있는 박제를 떠올려 보라. 삶이라 불렸던 운동성이 사물화 된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라고나 할까. 화려한 조명 아래의 적막한 그곳에선 방부(防腐)처리를 위해 뿌려 놓은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렇다. 결코 우리의 삶에서는 그런 냄새가 나게 해선 안 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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