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두 방향
<낚시 바늘이 갖고 있는 두 힘에 대하여>
태평양에서 조업하는 연승(延繩)어선에서 사용하는 낚시 바늘을 보다, 문득 그들이 갖고 있을 힘이 떠올랐다. 은빛으로 빛나는 강력한 휘어짐과 날카로움은 금방이라도 내 몸속 어딘가로 와서 박힐 것만 같았다. 다랑어라는 대형 물고기를 잡는데 사용되는 낚시 바늘은 더 크고 강한 힘을 뿜어낸다. 그래서인가 조업 현장에서 낚시 바늘은 어떤 위험성을 타고 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연승조업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 중 하나가 낚시 바늘과 관련된 것인데, 낚시 바늘에 걸리면 장력(張力) 때문에 낚시 바늘에 걸린 선원이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다행히 물에 빠지진 않는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심각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낚시 어구에 묶여있던 낚시 바늘이 때론 벗겨지기도 하고, 묶여 있던 라인(line) 등이 터지면서 낚시 바늘은 총알처럼 튕겨져 갑판 위를 날아다닐 때도 있다. 때문에 조업현장에서 낚시 바늘은 그 자체로 공격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낚시 바늘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날카로움’이다. 이때 ‘날카로움’이란 연속적인 작업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움’은 일종의 운동성이고 운동성이 주변과 함께 만들어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카로움’이 운동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날카로움이 어떤 ‘지향성(指向性)’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아무리 날카롭다 하더라도 지향하는 그 무엇이 없다면 ‘살아 있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죽어 버린 날카로움’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낚시 바늘은 그냥 ‘뾰족한’ 사물이 아니다. 지향성 즉 어떤 방향의 운동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운동성이라고 해서 공간 내에서의 단순한 이동 즉 궤적(軌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향성과 관련된 지향성이란 어쩌면 작동하는 질적(質的)인 힘일 것이다. 작동하는 힘으로서의 ‘사건’ 같은 것 말이다. 낚시 바늘이 기존의 운동 궤적을 벗어나 누군가의 몸속에 틀어박히는 통제 불가능한 힘 같은 게 그것이다. 그게 단순한 상징성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낚시 바늘의 날카로움이 갖고 있을 힘의 방향은 두 개다. 하나는 낚시 바늘 끝에 있는 것으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물고기의 몸속을 파고드는 힘이다. 그 힘은 작동하기 시작하면 한 방향으로 그리고 단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매우 민감할 뿐 아니라 너무 강력해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물고기의 몸 속 깊은 곳까지 신속하게 들어가 박히는 것이다. 물고기 역시 낚시 바늘에 걸렸을 때 어떤 힘이 자신의 몸속으로 전해지는 걸 쉽게 느낀다. 그리곤 순간 그 경계지점에서 퍼드덕 거리는 것이다. 이때 낚시 바늘 끝의 날카로움이 갖고 있는 힘은 낚시 바늘이 표방하는 위험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은 이해하기 쉽고 일방적이며 깊숙이 파고들어 가려는 직선적 운동성이다. 낚시 바늘의 본능이라고나 할까. 낚시 바늘 끝의 힘은 오직 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속도의 중독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물고기 몸속에 틀어박히는 일방적 힘으로서 낚시 바늘 끝의 날카로움은 낚시 바늘 전체가 원했던 본래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힘은 일방적으로 틀어박히기만 할 뿐 낚시 바늘을 적당한 깊이에서 고정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낚시 바늘은 물고기 몸속 어디쯤에선가 자신의 힘을 고정시키고픈 욕망을 갖고 있다. 즉 그저 깊숙이 박히는 게 낚시 바늘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을 물고기 몸 전체 확산시키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오직 한 방향의 힘만으론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끝없이 달릴 수 있지만 말 위에선 결코 자신의 욕망을 완성시킬 순 없는 것처럼.
그때 낚시 바늘의 일방적 힘이 더 이상 일방적이기를 멈추고 물고기 몸속에서 적절하게 위치하도록 하는 게 ‘미늘’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늘’이 낚시 바늘 끝이 진행하려는 힘의 방향을 완곡하게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늘’은 자신의 역할을 낚시 바늘은 물론 물고기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부드럽게 이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늘’이 갖고 있는 부드러운 능력은 낚시 바늘 끝에 있는 날카로움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게 ‘미늘’이 갖고 있는 핵심적 역할이 아닐까. 더구나 ‘미늘’은 낚시 바늘 끝의 날카로움에 비하면 크기 뿐 아니라 휘어짐도 거의 없어 그 누구도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낚시 바늘을 다루는 선원들도 낚시 바늘의 끝이 위험하지 미늘은 상대적으로 부드럽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원들 뿐 아니라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들에게도 ‘미늘’은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고기는 낚시 바늘 끝의 강력한 힘에 허둥대며 에너지를 소비할 때 낚시 바늘 끝과 함께 ‘미늘’은 깊숙하게 침투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늘’은 결코 지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결속에 숨어 있는 칼 혹은 덫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늘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늘’은 그저 낚시 바늘 전체가 물고기의 몸속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낚시 바늘 끝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의 그늘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비가역적인 역린(逆鱗)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파도더미를 뚫고 나오는 파도타기처럼. ‘미늘’은 낚시 바늘 끝의 강력한 직선운동을 억제하면서 그 힘을 쓸모 있는 힘이 되도록 일정한 지점에서 정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부드러운 조작자’처럼. ‘미늘’은 은밀한 지배자인가. 결국 ‘미늘’ 때문에 낚시 바늘은 물고기의 몸속에서 빠지지 않는다. 표면적인 힘과 내면적인 힘이 조합하여 이루어지는 게 낚시 바늘의 힘이고 그것에 부합하는 ‘미늘’이 힘인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중독(中毒)을 생각해 보자. 중독은 낚시 바늘의 끝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일방적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힘들이다. 일정한 문턱을 넘어가면서 가속도를 갖게 되는 중독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알 수도 있다. 하지만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병의 징후(徵候)와 비슷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중독이 시작될 때나 중독이 심화되었을 때도 오직 중독에만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중독의 깊이가 깊어져 그게 우리의 삶에 깊숙한 상처를 남길 텐데도, 상처를 알면서도 모른 체 하거나 아니면 그 상처가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고 여겨 버리는 것이다. 중독을 중독으로 느끼지 못하는 삶! 이것은 모든 중독이 갖고 있는 강력한 마비작용이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해 보이는 중독을 지속 가능케 하는 게 ‘미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어떤 중독이 우리의 습속에 적당히 박혀 있게 해 주는 게 중독의 가속도가 아니라 중독을 적절한 위치에서 제어하는 ‘미늘’이라는 말이다. 중독의 가속도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사이에 혹은 우리가 가속도에만 신경 쓰고 있던 사이에 ‘미늘’은 중독의 가속도 뒤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린 중독이 갖고 있는 가속도에만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울 뿐 ‘미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낚시 바늘 끝에 걸려 있는 ‘미끼’처럼 ‘미늘’은 낚시 바늘의 전체성에 ‘미끼’처럼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엔가 중독되었을 때, 그때 이미 우리 눈에 보이질 않는 내부적인 미끼 즉 ‘미늘’이 우리 몸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천히 작동하는 ‘내부적 미끼’, 하지만 예전부터 준비된 미끼가 ‘미늘’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엔 전염성이 강한 중독성이 널려 있고 모든 중독성 뒤에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작동하는 ‘미늘’이 있다. ‘미늘’의 크기나 힘은 중독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을 수 있지만 그 작은 크기의 ‘미늘’ 때문에 강력한 중독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는 ‘미늘’ 같은데 말이다.
‘미늘’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 감각이 강력함이라는 힘 쪽으로 너무 쏠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쪽으로 쏠리게 하는 ‘중독’이 가능케 하는 힘이 ‘미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늘’은 언제나 내부적이다. 그리고 중독이 작동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힘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중독이 작동할 때 그와 동시에 작동하는 게 ‘미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미늘’의 힘은 작동할 때 더 잘 보이질 않는다.
어찌 낚시 바늘만 그럴까. 좋아함과 미움, 즐거움이나 괴로움, 경제적 성공과 정치적 욕망 그리고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서도 ‘날카로운 두 힘’은 작동할 것이다. 두 힘은 다른 게 아니라 낚시 바늘을 이루고 있는 힘들이 아닐까. 그렇다, 모든 게 그런 힘들의 총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방향성을 가진 힘들 말이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방향으로도 혹은 그 반대로도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중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중독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없게 하는 ‘미늘’ 때문이기도 하다. 그처럼 ‘미늘’은 숨겨진 또 다른 위험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혹은 세상을 잡아당기는 뒤통수의 힘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전면(前面)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전면을 붙잡아 전면이 원하는 바를 가능케 하는 뒤통수의 힘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 역시 낚시 바늘이라고 하는 중독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 중독이 일상에 가득함에도 중독이라 느끼지 못하게 하는 ‘미늘’이 몸속 어디엔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