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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 소녀 하이디 Sep 05. 2019

그 해 겨울, 로잔(Lausanne)에서 만난 봄

나를 사랑한 도시 로잔, 마음을 움직이다.

로잔(Lausanne), 우아하게 들리는 그 이름처럼 마음도 예쁜 도시. 제네바와 몽트뢰 사이에 위치한 도시 로잔은 우리에게는 올림픽 위원회 본부 (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사랑한"도 아니고 "나를 사랑한"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이 도시는 나에게 많은 것을 나눠주고 경험하게 해 준 언니 같은 엄마 같은 도시이다. 스위스에 가기 전 갖고 있던 얼음같이 차갑디 차가웠던 나의 마음을 녹인 따뜻함이 스며있는 도시이다.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던 로잔에 대한 첫인상

봄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의 로잔의 날씨는 한마디로 "구리다". 흐린 날이 계속되고 바람이 분다. 이런 날에는 평소에는 아무리 멋있었던 호수라도 그 물빛이 짙다 못해 검푸른색의 높은 파도가 이는 심술궂은 호수로 변한다. 생애 첫 영어 인터뷰 시험에 도전한 나의 마음도 그랬다. 검고 푸른 호숫처럼 불안하고 답답했다.


내가 처음 로잔에 갔던 이유는 이곳에 위치한 학교에서의 인터뷰 시험이었다. 우리 학교의 인터뷰 시험은 타학교에서 흔히 하는 동문이나 입학시험 위원회 (admission committee) 대표자와의 일대일 인터뷰 형식과는 다르게, 원데이 인터뷰 시험을 치렀다. 일대일 인터뷰는 물론이고 개인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하는 프레젠테이션 인터뷰, 그룹 토론에서의 논리성과 협동성을 시험하는 그룹 케이스 인터뷰 (Group case interview)까지 아침부터 오후 서너 시까지 치러지는 강도 높은 인터뷰였다. 점심 식사도 학교 생활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도록 재학생과 함께하도록 학교 측에서 주선을 해 주었다. 당시에 확신하지 않았지만 예리한 "촉"으로 나는 느꼈다. 내가 하는 행동과 질문에 대한 재학생의 피드백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입학시험 평가에 포함되리라는 것을 (나의 "촉"은 정확했다. 입학 후, 나는 입학 위원회로부터 수험생과의 점심식사에 초대되었고 피드백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로잔에서 본격적인 봄이 시작 되기 전 즐기면 좋은 꾸덕한 핫초콜릿, 개나리와 목련도 함께


피자리아에서 만난 나를 위한 배려

강도 높은 인터뷰 시험과 심적으로 불편했던 재학생과의 점심 식사 후 나는 기진맥진했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피자리아 보칼리노(Boccalino)에 들어섰다. 오후 네 시가 넘은 시간이라 식당은 한가했다. 메뉴판을 펼친 나는 프랑스어로 써진 수십 종류의 피자 메뉴 앞에서 맥이 풀렸다.

"아무거나 시키지 뭐. 피자는 거기서 거기지. 토마토와 치즈만 있으면 되잖아".


나는 지금 들어도 멋지게 들리는 "카프리 (Capri)"라는 메뉴를 시켰다. 몇 분을 기다리고 나니 웨이터는 큼지막한 피자 한 판을 들고 나온다. 미니 사이즈를 시켰지만 혼자 먹기에는 정말 컸다. 게다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조그마한 정체불명의 멸치처럼 생긴 것은 뭐지?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크게 놀라지 않는 나는 일단 한 번 맛을 보았다. 식감은 물렁한 것이 그 맛은 엄청 짰다는 기억뿐이다. 큰 문제로 만들기 싫어 나는 조용히 소금물에서 방금 건진 것 같은 짜디짠 그 자그마한 멸치들을 걷어 내고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하나아, 두 우울, 이 정체불명의 생선들이 내 작은 접시의 코너에 산 처럼 쌓여갔다. 웨이터들과 요리사들은 내 테이블 위에서 작은 멸치들이 처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멸치를 골라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나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누군가 보니, 찌든 때가 묻은 앞치마를 두른 주방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나의 피자를 가리키며, 나보고 주방으로 들어오라며 팔을 흔든다. 피부색은 검고 털이 수북한 팔을 걷어 올린 이 사람. 첫인상이 무서워 주방으로 따라 들어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쭈뼛쭈뼛했지만 메뉴에 대해 일언지하 컴플레인도 하지 않은 나에게 별일 있을 쏘냐 생각하며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이 분, 토핑 재료들이 가득 담겨있는 백종원 아저씨의 최애 아이템처럼 생긴 스테인리스 정리함 앞에 나를 세우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걸로 골라봐요. 피자 한 판 다시 구워줄게요.”


아하… 순간 나는 울컥했다. 메뉴에도 없는 나만을 위한 피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레스토랑의 수많은 손님들 중 한 명일 뿐인 나를 위해 베푼 그의 친절은 주방으로 들어오기 전 몇 초 동안이나마 그의 생김새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판단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낯선 사람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주방 아저씨의 마음의 여유가 고마웠고 그 마음을 본받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나, 이 짜디짠 멸치는 앤쵸비라도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먹어본 생선 중 내 입에 맞지 않는 유일한 생선이지만, 이 앤쵸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낯선 이가 베푸는 친절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로잔의 앤쵸비는 사랑스럽다.


로잔 시내에서 호수를 바라볼 때 만날 수 있는 풍경


내 마음속 겨울에 봄을 가져다준 사람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늘 혼자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장녀이다. 우리 가족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친가 가족 모두를 통틀어 나는 모두에게 모범을 보이고 약하거나 부족해 보이면 안 되는 그런 아이였다. 동생들과 다투어도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거나 이유를 불문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희생하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우리 가족에 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꿈을 내려 두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개인적인 슬픔을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에게 공유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었다. 나는 내 문제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내 가족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나는 그런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가지고 가족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온 스위스 로잔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영어를 충분히 공부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에서의 수업이 이해되지 않고 자꾸만 뒤처질 때 내 친구와 커리어 코치는 내가 나의 가족들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던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 친구는 나와 같은 아시아 사람이었지만 나보다 먼저 유럽에 와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한 경험이 많은 친구였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과 불안함을 이 친구는 나보다 먼저 경험했고 힘들어하는 나를 많이 위로해 줬다. 나의 커리어 코치는 하는 인터뷰마다 마다 똑 떨어지는 무능한 나에게 나보다 유능한 사람은 없다며 무한 긍정의 마음을 심어 주었다. 내가 지금 나의 멘티들에게 하는 “많은 곳에 합격할 필요 없다. 네가 원하는 한 곳에서만 오퍼를 받으면 된다.”는 조언을 해 준 코치도 이 분이다.


마음의 여유가 사람들, 나의 마음을 움직이다.

입학 전 스위스에 도착한 12월 말의 날씨는 인터뷰 날 날씨처럼 춥고 비가 왔다. 학교의 소개로 도착한 아파트는 보일러가 고장 나 찬 공기가 한가득이었다. 텅 비어 있는 냉장고와 아직 설치되지 않은 인터넷. 기차역 앞까지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걸어 당시 내가 아는 한 유일하게 공짜 인터넷이 가능했던 곳, 맥도널드에 갔다. 햄버거 가격은 어찌나 비싼지 (엄밀히 말해 인터넷은 공짜가 아니었던 셈이다).


컨시어지 아줌마는 나에게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니?", "한국이라면,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라고 물으며 내 나라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학기 중 간혹 병원에 갈 정도로 아팠던 나는, 프랑스어를 거의 못해 영어에 서툰 간호사들의 짜증스러운 말투를 상대하며 나의 증세를 조곤 조곤 설명해야 했다. 아픈 것을 참는 것보다 실제로 이들의 무성의함을 참아내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내가 이런 곳에서 앞으로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유학 결정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방인으로 겪은 이런 껄끄러운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마음의 여유를 나와 나누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잊었다. 평소에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참을성 없는 나는 이곳에서 만큼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잖아?"


Old & New 로잔 구석 구석 둘러보기


떠나고 보니 더욱더 그리운 로잔의 봄

7년의 생활 후, 스위스를 떠날 즈음에는 나도 마음이 필요한 다른 이에게 나의 마음을 조금 나누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었다.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고, 내가 남과는 달라도 괜찮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심적으로 튼튼하게 살 수 있겠지" 생각하며 시작한 일본 생활은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도 나는 유럽 사람들이 보여줬던 내 나라에 대한 무지함을 여전히 느낀다. 택시 기사와 가게 점원들은 남편에게 꼭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본다. "프랑스"에서 왔어요 라고 답하면 그들은 늘 "좋은 곳에서 왔네요!!" 하며 반기고, "프랑스를 너무 좋아한다", "아름다운 나라"다 하는 칭찬을 열정적으로 쏟아낸다. 남편은 그들이 물어보지 않아도 "제 부인은 한국에서 왔어요." 하며 나를 소개한다. 열에 서너 명은 "아~ 그렇군요"라고 그냥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우리 엄마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요" 내지는 "제 동생이 BTS 팬이에요"라고 답한다. 그들이 보이는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맹목적이다. 프랑스에 다녀온 적도 없고 샹송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이와 다르게 한국에 다녀온 적도 있고 드라마와 음악도 더 많이 접했을 지라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다.


내 나라와 더 가까운 곳에 살아도, 나는 이곳에서 더욱더 이방인이다. 로잔에서 만났던 피자집 주방 아저씨도 졸업 후 백수로 남을까 걱정하는 나의 어깨를 다독여 주던 코치도 여기에는 없다.


로잔에서 얻어온 자신감도 용기도 내 마음속 어딘가로 꼭꼭 숨어 버렸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과 하이디도 스위스를 대표하지만, 나에게 스위스를 대표하는 것들은 다름 아닌 로잔의 봄이다. 내 마음의 봄. 여유 있는 마음의 사람들이 나누어준 따뜻한 마음. 떠나고 보니 더욱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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