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는 얼마나 즐거운가
보고서를 써야 할 때가 왔다: 알고는 있었다.
주말 자라매장의 세일가격만큼이나 쨍한 하늘색 목 폴라티를 고르면서 초조한 감각은 시작되었다. 사실, 그때부터 내 가슴은 알고 있었다. 이제 정말 보고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고. 긴 줄에 서있다가 뿜어진 꽃향기의 향수, 추운 공기 냄새, 패딩의 땀, 그리고 S, M, L 사이즈, 현란한 무늬와 삼만육천 원의 노란색 보송보송한 니트와 가슴이 훤하게 파인 흰색 원피스를 보면서 좀 무시를 한건 사실이었다.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감각, 그것은 아마 6권부터 이미 발 빠른 사람들이 가져가버린 슬램덩크 재판 만화책을 만화방에서 읽고 있을 때부터, 새우깡을 먹으면서 낄낄대며 만화책을 보다 커피를 바닥에 쏟아버렸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바닥 무늬만큼이나 얼음이 깨져버려서 장걸레로 닦아 버렸을 때도 이제는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마 만화방을 빠져나와 좁고 어스름한 동네 골목을 포장한 떡볶이와 짐이 되어버린 우산을 들고 가고 있을 때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 일이다. 혹은 탄산수를 마시고 제로콜라를 마신다음에 그 후에도 계속.
그리고 출근, 그리고 점심시간, 그리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피곤하니까 한숨 자고, 한숨 자니까 그다음에 배고프니까 저녁 먹어야 한다. 저녁 먹으니 졸리고 유튜브도 좀 보고 싶고, 갑자기 뉴스가 재미있고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소비자 물가와 예능, 그리고 요즘 재미있는 영화와 애니메이션들. 세상에 보고서 빼고 다 재미있고 선명하며 명확하고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 보인다.
왜 보고서를 쓰기 싫은 걸까: 알고는 있다니깐.
보고서를 왜 쓰기 싫은 것인가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작하는 게 너무 어렵다. 정해진 형식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는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어느 정도'라는 말은 참 너무 어렵다. 아예 처음부터 일부터 100까지 뭘 찾아야 하고 뭘 검색해야 하는지 정해주었으면 좋으련만, 다 큰 성인에게 이 사회는 너무나 가혹하다. 아주 큰 그림만 제시하고 그 안에 디테일한 속지를 채워가는 것은 월급 받는 직장인 CC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둘째, 그런 맥락에서 이어질 수 있듯이, 그냥 너무 싫다.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는 이렇게 재미있고 즐겨야 하는 것들이 이리 널려있는데, 직장인 CC는 월급이라는 족쇄하에 이 모든 것들을 등 돌린 채로 보고서를 써야 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밌고 즐기는 것들은 월급을 지불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 위해서 직장인은 보고서를 응당 써야 하는 것 또한 너무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정말 하기 싫다는 고통은 어찌 된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커져만 간다.
셋째, 그런 맥락 와 상관없이, 사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아무것도 시작 못하는 것도 있긴 있다. 한번 할 거면 잘하고 싶어, 그런데 첫 번째 이유와 같이 너무나 애매모호한 서식과 자료들의 범위는 잘하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을 계속 미루고 미루게 된다. 조금만 더, 진짜 오랜만에 간 자라 세일만 간다음에, 그리고 주말이니까 만화책 보고 떡볶이 먹은 다음에, 에라 모르겠다 퇴근하고 쓰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보고서 미루기의 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알고 있어서 더 비극적인, 하지만 끊을 수가 없어.
아홉 시가 되어, 내일 출근하는 내가 출고 예정되어 있는 시간이 되면,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협상을 하게 된다. 음... 한 시간만 더 딴짓하면 안 될까?라고 오늘의 내가 이야기하면 내일의 나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이 아니며 결국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며 소모품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새벽에 생명을 파는 행위는 부적절하다며 당장 보고서를 쓰라고 채근을 한다.
결론은 으레 두 가지 갈림길에서 판결이 난다. 미루다가 지나쳐 버리게 된 것들, 결국에는 눈물은 머금고 미루다가 새벽 어스름한 시간에 만들고 마는 것들이 이 두 가지이다. 일상적으로는 두 가지 갈래길이 결국 평행선을 그어버리다가 정말 아주 가끔 어딘가 그 어드매에서 만나는 적도 많지만, 일적으로는 미루다가 지나쳐버리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머금고 해 버리는 경우가 결국 많게 된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나는 오늘 보고서 쓰기를 시작해야 하며, 이제 시작할 것이다.
마음으로 먹는 마라탕, 마음으로 먹는 엽기 떡볶이, 자극적인 MSG가 팍팍 쳐져있는 보고서 미루기, 새벽에 울면서 들었던 가슴을 서늘하게 쓸고 심장을 타격해 버리고 갔었던 EDM 노래처럼, 그 어떤 보고서도 언젠가 또 미루겠지만, 이제는 이제는 진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