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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Jul 21. 2022

공포문학의 밤

<심야괴담회> 제작 기간에 써두었던 글이다. 다 내려놓은 지금은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에 불과하겠지만.



하드 디스크를 정리하다 보니 '아이디어 노트'라는 제목으로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적힌 파업 시절의 한글 파일이 나왔다. <심야괴담회>를 구상할 때쯤이었나 보다. 원제는 <공포문학의 밤>이었다. 이런 제목을 단 프로그램을 누가 보겠나, 하고 실소가 나왔다. 나의 피디 행로가 6,7년 동안에 먼 여정을 지나왔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하는 그런 제목이었다. 


나는 왜 공포와 괴담에 매혹되었나? 공포와 최초로 조우했던 순간은 아주 어렸을 적, 이모와 삼촌 손에 끌려가서 본 미국 공포영화 <헬 나이트>인 것 같다. 아주 어려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섹시하게 차려입은 금발 미녀를 컨버터블 보닛 위에 태우고 이상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장면, 해골을 보고 소리 지르는 장면, 보닛에 탔던 여성이 살해당하는 장면 등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사실들이 많이 발견됐다. 먼저 이 영화는 <엑소시스트>의 주연 린다 블레어가 성인이 되어 찍은 영화였고, 흥행 참패를 불러온 졸작이었다는 점. 그리고 영화 상영관의 이름을 똑똑하게 기억하는데, 지금은 없어진 '허리우드 극장'이었다. 점증하는 정치적 저항에 골머리를 썩이던 전두환 정권은 급기야 야간 통금을 해제하고 심야 영화 상영을 허용했다. 사람들이 밤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기록을 읽노라니, 영화를 보러 갔던 때는 아마도 세 살 남짓한 나이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로 2가에서 훤한 빛을 받으며 인사동 초입에 자리한 허리우드 극장으로 향할 때, 사람들의 수런거림. 삼촌이 재빠르게 연탄불에 구운 오징어와 군밤 일속을 사 와서 싱긋 웃던 모습. "이모, 허리우드가 무슨 뜻이야?" 하니, 삼촌이 "허리가 어쩌고 저쩌고"하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왜 공포에 매혹되는가? 우선 떠오르는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들 때문일 것이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에서 조금이나마 밤의 자유를 누렸던 기억, 졸고 있는 부엉이와 자고 있는 아이들의 그림 위로 '어린이 여러분은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공지가 흐를 때, 굳이 졸음을 참고 마의 9시 능선을 넘어서 기다리던 <전설의 고향>. 어릴 적 누군가 사들고 들어온 <세계의 유령 대백과> 삽화를 보고 기절초풍해서 잠을 못 이루던 기억들. 나는 금기 위반의 쾌락에서 오는 스릴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봤던 것 같다. 갑갑한 현실 속에서 비극과는 다른 방향에서 작용하는 카타르시스에 매혹되지는 않았을는지. 이성과 과학이 모든 신비의 꺼풀을 벗겨낸 지금, 오로지 이야기 속에서만이 신비와 괴이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성의 빛이 휩쓸고 간 잔여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만 구전되는, 그리고 인터넷 짤방으로 전승되는 괴담은 이런 신비와 괴이를 보존하는 단지가 된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유명한 장소에 가려고 하고 유명한 사람들만 보려고 한다. 유명한 사람들이 쓴 유명한 말을 되새기고 유명한 글을 읽는다. 돈이 없어 습하고 곰팡이 핀 월세방을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 고시를 볼 것도 아니면서 고시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학생들, 낚시꾼, 물놀이를 하는 행락객들, 그들이 말하는 삶과 경험은 그나마 '썰'의 형태를 갖추어야 사람들의 관심사로 눈과 귀와 입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불균형. 오래전부터 나는 이런 불균형에 어쩐지 마음이 이끌렸다.  


이런 사회적인 불균형 외에도 괴담에는 내용 상의 불균형이 있다. 앎과 모름, 지와 미지 간의 불균형. 괴이의 원칙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는 없으므로 그 미지 속에서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어두운 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골목 앞에서 하늘거리는 흰 환영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사람 속이다. 나는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귀신은 한계에 다다른 뇌가 그 한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대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예전에 어느 출연가가 이런 말을 했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 왜냐하면 귀신은 사람처럼 물리적 위해를 잘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한의 해소'라는 목적이 분명한 귀신들과는 달리,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PD수첩>이 그려내는 뱃속 검은 사람들의 세계보다는 <심야괴담회>의 귀신들이 보다 안온한 환경에서 스릴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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