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괴담회 시즌4 제작일지
필립 K. 딕의 소설 같은 제목을 써놓고서, 적잖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다. 아버지는 WWE를 열심히 보는 중학생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식은 이유는 모 레슬러가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한 이후부터다." 그래서 내가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시청자들이 '귀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만든 귀신 프로그램은 믿을 수 없다'고 할까 봐 걱정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살면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은 적은 있지만, 태생이 유물론자인지라 피로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환영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공포 프로그램이었나? 그 이유는 단순히 미개척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심괴>의 출발 또한 철저하게 전략적이었다. 첫째, <신비의 아파트>의 성공을 목도했던 바, 잠재적 시청층이자 공포 콘텐츠에 충성도가 높은 10대를 노린다. 둘째,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이라는 옛날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사람들의 삶이 척박해질수록, 그에 대한 반동으로 뭔가 '믿을 것'에 의지할 것이므로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에 기대어 수익을 낼 만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 셋째, 짤막한 형식을 취해서 유튜브로 재가공과 유통이 쉬운 콘텐츠를 제작해 보자. 넷째, 스스로 임상실험을 통해 터득한 공포 콘텐츠의 강력한 중독 효과를 활용하자. 이 정도면 <심괴> PD는 귀신에 매료된 사람이라는 일부의 기대를 충분히 실망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도감 출간에 열광하고, 인터넷에 짤막한 괴담이라도 올라오면 지나치지 못하며, <파묘> 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내 일처럼 기뻐하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귀신을 믿지 않지만 귀신 얘기에 환장하는 사람. 어떻게 이 모순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게 다 '괴담'의 매력에 있다고 본다.
괴담이란 무엇인가. "괴이쩍고 무서운 이야기, 특히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를 말한다. '괴담'이라는 말은 아마도 고이즈미 야쿠모, 그러니까 라프카디오 헌의 유명한 책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고,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무서운 얘기' 혹은 '귀신 얘기'라고 하지, 괴담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귀신 얘기라고 하면 당연히 귀신이 나와야 하지만 괴담이라고 해서 꼭 귀신이 나와야 하는 법은 없다. 귀신은 괴담의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귀신이란 무엇인가. 나는 귀신을 '귀신 본 사람들이 살면서 겪어온 트라우마의 총화이자, 사회적 고통의 외화'라고 본다. <요재지이>를 보면 유사한 패턴들이 눈에 띈다. 가난한 학사 혹은 홀아비 농부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대궐 같은 집에서 미녀와 동침하며 주안상을 받았다, 아침이 밝아오자 무덤에서 백골과 껴안고 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는다는 얘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런 이야기들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괴담에 투영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나마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현실의 강고함은 그 위로마저 좌절시킨다. 괴담은 곧 좌절과 실패, 구원이 얽힌 이야기다. <심야괴담회> 응모작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부유한 집안의 얘기들은 거의 없다. 적수공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혹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어쩔 수 없이 싼 집에 들어간 사람들은 여지없이 가위에 눌리고 귀신을 본다. 열심히 일하다가, 소박하게 계곡에 놀러 가서, 부모를 봉양하거나 군대에서 근무를 서다 귀신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귀신이 되는 것은 어떤가? 가난해서, 비명에 죽어서, 악한에게 몹쓸 짓을 당해서, 사회의 부조리와 맞닥뜨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귀신이 된다. 제대로 천도되지 않은 원혼은 한을 삭힐 수 없어 산 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듯 귀신 얘기는 민중의 원념을 담고 있다. 품어왔던 소망뿐 아니라, 그저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좌절될 때, 그 원념이 응축되어 귀신으로 나타난다. '나도 저렇게 떵떵거리며 살아보고 싶은데.'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한계들을 영혼은 쉽게 넘나든다. 그러나 영혼이 되어 완성된 원념은 실체가 없는 허무이다. 따라서 괴담의 본질적 성격은 허무다. 잘 된 괴담을 읽으면 씁쓸한 여운이 남는 것도 이런 허무함이 잘 형상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읽은 괴담이 이제 수 천편에 이른다.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것을 믿으며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다. 귀신과 축귀의 양태들이 한국 사회를 반영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단순한 귀신목격담이나 가위눌림 체험담을 넘어서는 삶의 좌절과 절망에서 솟아 나오는 기이한 에너지를 가진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서술에서 구술로 옮겨가면서 가끔은 휘발된다. 그 반대로 재연 영상을 통해 이야기가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괴담의 형식 자체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괴담이 굉장히 독특한 형태의 문학 양식이라는 것은 여러 번 이전에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괴담의 형식과 비견할만한 것은 일본의 '하이쿠'라고 할 수 있는데, 비교적 대중적인 접근이 용이하고, 짤막한 길이 안에 주제 의식이 전체적으로 산포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담이라는 장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성격이 하나 눈에 띈다. 이를 무엇이라 해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입가에서 맴돌기만 해서 고민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나오는 "비개연성의 개연성"이라는 표현을 비틀어서 '비사실성의 사실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직접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에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심괴>에 달린 댓글들에 유독 눈에 띄는 말이 '주작'이라는 인터넷 속어다. '사실이 아닌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라는 비난이다. 그렇다면 '주작'이라는 댓글을 단 사람들은 정말 귀신을 보고 겪어 귀신의 형태를 인지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사연자와 동일 혹은 유사한 체험을 했기에 자신 있게 이야기의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주작'이 싫고 '팩트'가 좋다면 <PD수첩>과 <실화탐사대>를 보면 될 일인데, 유독 <심괴>만을 '주작'이라고 비난하고, 사연이 사실일 것을 요구하는 모순적인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런 양가감정도 괴담의 형식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괴담의 성격을 일종의 '전도된 (역설의) 리얼리즘' 혹은 '도착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괴담의 독자들은 이것이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얘기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며, 사실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한다. (사진, 영상, 인터뷰 등등) 귀신, 유령의 존재가 허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 밖의 모든 요소들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사실적이면 사실적일수록 귀신이라는 허구의 힘은 증폭된다,
<심야괴담회>에서 소개되는 괴담은 크게 세 가지다. "뒷짐 지고 자는 친구"(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의 의미를 모르겠다.)와 같은, 소위 'MZ괴담'이라고 불리는 단속적이고 자극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괴담, 그리고 "신혼집 다락방", "낙동강 돌탑"같은 삶의 경험, 역사적 사실들이 혼재된 '고전 괴담'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시장"과 같은 기담이 있다. 이 세 가지 성격을 고루 갖춘 괴담은 '레전드'가 된다. 공포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이다. 개인이 느끼는 공포심은 그 대상에 따라,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앞으로 <심괴>의 생존 또한 얼마나 다양한 유형의 무서움을 소개하느냐에 달려 있다. 메인 PD라고 해서, '꼭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심괴>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게 제시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 지향점이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 한국인들이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사회적 고통'을 보다 깊은 층위에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괴담과 군대 괴담은 폐쇄된 사회에서 오는 고립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흉가 괴담은 부동산 가격 상승의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졌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비애를, 여귀 괴담은 여성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과 폭력을 담고 있다. 10대를 지향해서 수익을 내야 한다고 말하며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나는 <심괴>가 단순히 초딩 놀래키는 프로그램으로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청자들이 단순한 귀신 얘기를 넘어서,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하며, 귀신을 보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TV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가 수백만의 사람들과 공유되는 광경을 보면서 숨겨두었던 고통을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수많은 괴담을 읽다가 어느덧 눈길이 멈춰 서게 될 때는 바로 "이런 사연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다"라든가, "여기에 털어놓게 되어 후련하다"는 말이다. "그래요. 여기 기 세고 독한 방송국놈들이 모든 한을 강력한 전파로 태워드리겠습니다. 다 털고 가세요. 이제 다 잊어버리세요." 내가 출연진들에게 바라는 역할도 공포심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끝에 가서는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정신의학 요법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