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
그 유명한 『침팬지 폴리틱스』의 저자이자 동물행동학의 권위자인 프란스 드 발이 쓴 책이다. 제목 그대로 ‘공감’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자는 사람 의 행동이 아닌, 자기 연구 분야인 동물의 행동에서 그걸 찾았다. ‘공감’이란 말 때문에 홀린듯 들여왔고, 읽는 내내 매우 공감했지만, 시차를 두고 생각해보니 저자의 주장에서 꽤 많은 부분 공감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이래서 생각도 시간을 가지고 다듬어야 하나보다).
마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내 공감을 강탈해간(?) 부분부터 시작해보자. 내 생각에 이 책이 남긴 가장 중요한 성과는 자연계(또는 과학)에서 공감의 지위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또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이없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연 선택을 부자나 권력자, (더 이상하게는) 근육을 부풀린 개체들이 생존 경쟁에서 이긴다며 착각하는데, 드 발은 시작부터 “삶에 대한 투쟁이 자연의 본질이니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마시라”라고 못을 박는다. 다시 말해 포유류나 영장류의 행동을 보면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경우가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상 전체가 이 주장에 대한 증거라고 봐도 좋을 정도인데, 그러다 보니 책을 읽다 보면 적자생존 광신도들을 신나게 비웃게 된다. 과학책 읽으면서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줄이야.
이런 카타르시스도 좋았지만, 적자생존 신도들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힘 자랑을 ‘과학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다는 게 더 좋았다. 이전까지는 ‘자연주의 오류’ 같은 어려운 말을 써가며 길게 반박해야 했는데(당연히 상대방은 이런 말도 모른 척했지만), 이 책이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준 덕분에 그건 ‘네 희망사항’이라거나 ‘미신’이라고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있으니까. 사실 과학자 입장에서 이런 책을 쓰는 게 쉽진 않았을텐데, 반대 진영에서 날을 세워가며 논쟁을 위한 논쟁에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그러나 프란스 드 발은 용기를 냈고, 좋은 과학 레퍼런스를 안겨주었다. 이러니 의미 있는 책이 될 수밖에.
기억하고 싶었던 또 다른 대목은 “법학, 경제학, 정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객관성을 가지고 자신의 사회를 볼 방법이 없다”면서 과학이 확인한 협동 “경향을 간과하는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는 드 발의 주장이었다. 과학이 발견한 협동-친화적 성향을 사회과학 연구자들, 나아가 정치인들이 모른 척한다는 이야기다. 가령 경제학은 인간을 아직도 최대한 자신의 목표을 실현시키기 위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논리를 펼치는데, 과학자들은 이런 인간관을 흡연 호랑이 연구하던 시절에 내다 버렸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문제는 손가락만 가져다 대도 먼지 날릴 것 같은 경제학의 영향력이 사회과학 중에서도 끝판왕이라는 거다. 한정된 재화의 효율적 분배를 목표로 한다는 경제학이 목표를 잘 수행해냈을까? 아니, 설명은 잘 해냈을까? 책에서 소개한 앨런 그린스펀의 사례를 보면 전혀 안 그런 것 같다.
드 발은 호모 사피엔스가 마냥 친절한 종은 아니더라도, 반대로 폭력적이기만 종 또한 아니라고 말한다. 포유류 대부분이 협동이 필요한 상황에선 언제든 뭉치고, 심지어 연대감까지 발휘한다는 것이다. 인류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렇기에 정치는 기존의 사회과학에 더해 과학적 발견을 보태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드 발의 주장을 내 방식대로 읽어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사람이 세상을 모두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 사람의 뇌가 열량을 최대한 아껴 쓰다보니 편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신경과학의 발견 감안한다면, 인간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한’ 사상 또는 제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의 몇몇 대목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내 마음에 남았는데, 공감의 기원을 ‘진화’라고 못 박은 대목이었다. 아니 대목이란 말도 맞지 않는 것이, 진화가 공감의 기원이라는 말은 책의 논지를 세우는 철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몸과 마음은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희망을 읽고 낙담하게 된다.”(p.26)는 말이나, “공감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인간 종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p.100)는 발언이 그 예시인데, 처음엔 공감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나도 모르게 실눈을 뜨거나 고개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이게 된 것이다.
내 의문은 인간의 협동이 생물학적 진화에서 유래했느냐는 것이다. 『위어드』의 저자 조지프 헨릭은 유전자 진화에 문화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의 대표 주자인데, 전작인 『호모 사피엔스 - 인류를 지배종으로 만든 문화적 진화의 힘』에서 그 이론을 아주 잘 정리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인간이 지배종이 된 것은 ‘학습 능력’ 덕분이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은 문화의 형태로 전수된다는 것, 그리고 문화가 생물학적 진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헨릭은 후속작인 『위어드』에서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의 실제 사례를 소개한다. 유럽이 산업혁명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2000여년 전 유럽에 자리 잡은 이러저러한 문화(여기에 대해선 서평 작성 예정)을 학습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 2000년 동안 자리를 잡은 문화 때문에 유럽 바깥의 사람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관찰되었는데, 헨릭은 이걸 문화가 생물학적 유전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생각한다.
헨릭의 논의를 거드는 또 한 명의 학자가 있으니, 바로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이다. 배럿은 구성된 감정 이론(theory of constructed emotion, TCE)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데, 구성된 감정 이론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기존 심리학은 사람이 즐거움, 기쁨, 슬픔, 공포 등을 뇌에 장착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설명했는데(basic emotion theory, BET)(이 이론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걸 가능하게 한 것은 진화일 것이다), 우리(뇌)가 학습 능력을 타고난 탓에 이러한 감정 또한 태어난 후에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감정을 구성하는 복잡한 절차는 생략). 이 경우에도 학습이 주요한 화두인데, 드 발이 협동, 나아가 (협동을 이끌어내는) 공감이 내재된 본능으로 간주한다면 배럿은 그게 다 태어나서 학습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드 발이 『공감의 시대』에서 공감에 관해 펼친 논리는 헨릭-배럿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인 셈인데, 드 발이 협동의 기원을 진화, 더 정확하게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찾고 있으며, 이는 협동이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헨릭은 『위어드』에서 “문화적 진화 과정은 유전자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 비해 빠르고 강력하다”고 주장하면서 근거로 20세기 동안 교육 제도(문화)와 자연선택이 유럽 청소년들의 학업 성취도 향상에 기여한 수준을 들었는데, 아니 글쎄 교육이 9~11년 향상, 자연선택이 8개월 퇴보라는 압도적 차이를 기록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문화와 유전자 중 사람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는데,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서 문화의 영향이 이 정도로 크다면, 협동의 기원을 ‘진화’에서 찾은 드 발의 주장이 얼마나 설명력을 지닐 수 있을까? 드 발이 후천적 학습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무시한 것 같진 않지만, 이러나저러나 논지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을 수밖에. 그렇다고 누굴 지지하네 마네 선언(?)하기도 어려운 것이, 두 입장이 각각 모듈론(Modularity / Nativism)과 구성론(Constructionism) 진영으로 나뉘어 한창 논쟁중이었던 탓이다. 전혀 없는 일개 서평러로서 누굴 지지하기엔 학술적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열혈 지지자가 된다면 그것도 우스운 노릇이니까. 어쨌든 책을 덮고 나서도 마냥 후련하기만 하진 않았다는 게 책이 남긴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이런저런 의문이 남았어도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을 남겨준 책인 걸 부인하진 않으련다. 요즘 사회가 바닥을 드러낸 호수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만큼 협동, 공감 같은 걸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의 시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곤 해도, 충분히 단비 같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은 무조건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