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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Apr 09. 2019

적당한 거리

1년 반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미용실이 있다. 어쩌다 추천으로 가게 됐는데, 처음에 마음에 들어서 계속 다니고 있다. 집 근처도 아니고, 비용도 동네보다 제법 비싼데도. 머리는 조금만 다르게 다듬어도 원하는 느낌이 안 나오기에(설령 그 차이는 나만 알지라도), 그 느낌에 맞는 데를 가야 한다.


여기는 특이하게 커트 전 꼭 머리를 감겨준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원하는 음료수를 고른 뒤 마시다 보면, 샴푸 할 때가 된다. 샴푸를 하고 나서 머리가 적당히 젖은 채 자리 앉으면, 1년 반 동안 담당하는 선생님이 웃으며 오늘은 머리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갑자기 충동이 생겨 펌을 위해 잠깐 길렀다가, 내가 레퍼런스 삼은 사진들이 주는 느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깨닫고, 다시 원래로 돌아갔던 올 초를 제외하면 대부분 '저번처럼요!'라고 말한다. 그럼 대강 나도 기억할 만한 순서로 다듬기 시작한다.


서로의 컨디션에 따라 말이 많을 때도 있고, 한 마디도 없을 때가 있다. 나는 둘 다 좋다. 없으면 눈을 감고 명상하는,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좋다. 말을 하면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밌기도 하고.


주로 이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거는 주제는 '오늘 머리 자르고 뭐 해요?'이다. 나는 대부분 솔직하게 말했다. '친구 만나러 가요', '데이트하러 가요(솔직하다 보니 이젠 말하지 않는다)', '집에 바로 가요'.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면 어디서 보냐, 만나서 뭐하냐 묻는다. 동네로 가요, 홍대로 가요, 밥 먹어요, 영화 봐요, 카페 가요.


그러면 친구들이랑 술 안 마셔요?라고 묻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1년 때까지, 매번 술 안 마시고 카페에서 만나서 대화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초심을 잃지 않고, 같은 질문을 했다. 어제도 그 질문을 들으며 뭔가 이 기시감이 재밌단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내가 머리를 어디로 넘기는지를 묻는 걸로 볼 때 거의 나를 기억 못 하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다.


1년 반 동안, 염색도, 펌도 안 했지만 꾸준히 왔던 나에 대한 기억이 딱히 없다는 게 재밌었다. 나도 사람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이기에, 이 선생님이 하루에도 수십 명을 만나고, 그렇게 한 달이 모이면 기억이 안 날 만하단 생각에. 1년 반 동안 몇 가지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나눴지만 그건 비눗방울처럼 그 순간만 있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언제 졸업했는지와 같은 사소한 부분은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이마저도 '아직 학생이죠?'라는 말에 '직장에 다녀요..!' 답하자, '아 작년에 졸업했지요?'라고 한 거지만). 만화 <바텐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십수 년 전에 만난 손님이 무엇을 마셨는지도 기억하는 건, 만화이기 때문이겠지. 나를 기억해주면 고마운 거지만, 기억해주지 못해 안 좋은 마음이 들진 않는다.


단지 1년 반 동안 천천히 다져놓은, 그리고 분명히 드러난 거리가 보여서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 그 시간 동안만의 관계, 돈을 지불하고 인사하고 문을 나서면 사라지는 관계, 1달에 1번 1시간 정도만 유지되는 관계. 서로 서운할 것도, 반가울 것도 없는 관계. 딱 적당한 거리가 분명하게 보이는 관계라는 데에서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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