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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Sep 11. 2021

제주 한 달 살이 (28)

2021년 9월 10일 금요일, 탑동 골목

  제주 탑동 골목을 예약했다. 마주해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정면의 스크린만을 바라보며 서로의 신청 곡을 듣는 곳. 음악을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나누는 것은 더 사랑하는 나는 방문 두 시간 전부터 이곳의 방문이 꽤 기대되었다. 따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날씨 앱에서 비가 온다 그러기에 느리고 울리는 단조의 알앤비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 곡을 몇 곡 넣다가 영상을 틀어 주는 곳이라면 역시 무대 영상이 좋겠지, 하고 좋아하는 무대 영상도 목록에 넣어 두었다.


  예보와 달리 비는 오지 않았고 공간은 자그마했다. 그래서 집중하기 더 좋았다. 어떤 곡이 첫 곡으로 나올지 두근두근했다. 모르는 곡이었다. 가사 첫마디가 압권이었다. ‘인스타로 몰래 보는 너의 하루들’이라……. 발라드 다음으로는 EDM이었다. 잔잔히 즐겨 볼까 하면 꽝꽝거리는 분위기로 돌변하여 영상을 배경 삼아 친구에게 편지를 쓰려던 내 계획은 조용히 접어 두고 스크린에 눈과 귀를 꽂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아, 내가 원래 틀려고 했던 음악은 이 순간에 아니군. K-POP도 나오고, 어쿠스틱 위주의 인디 곡들도 나왔다. 음악이 바뀌어도 모두 꼿꼿이 앉아서 감상만 하시기에 누가 신청한 곡인지, 어떻게 즐기고 계신지도 감이 안 왔다. 수줍음을 숨긴 채 자신의 취향을 빵빵한 서라운드로 드러내는 것 같아 웃음이 샜다. 하이볼 한 잔에 긴장이 풀려서 발도 까딱까딱, 고개도 까딱까딱 움직였다. 지금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릴 영상이 무엇일까.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은밀하게 또 솔직하게 드러내는 공간과 잘 어울릴 곡은 무얼까. 개인의 행복이 공통의 행복이 될 수 있는 그런 곡이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 끝에 무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영상을 함께 봐야겠다 생각했고, 나는 Bren Joy의 Henny In The Hamptons와 Easy Life의 Sangria를 신청했다.


Henny In The Hamptons 라이브 영상

  다들 가만히 듣고만 계신 줄 알았더니 제법 즐겨 주셨나 보다. 사장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처음 듣는 노랜데 좋네요! 다른 분들이 노래 제목 뭐냐고 많이 물어보시네요’. 잘 어울리는 곡을 잘 어울리는 순간에 선물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내적 친밀감이 샘솟아서 사장님께는 같은 라이브 공연의 다른 곡을 추천해 드리고, 앞에 놓인 방명록에 샘솟았던 마음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제주 한 달 살이를 하고 있고 이번 주말이면 이제 육지로 올라가는데……’의 구구절절 스타일로 시작해서 ‘옆자리 앉은 분 데이식스 음악 신청하신 것 같은데 저도 그 음악 좋아해요’ 하고 느낌표를 잔뜩 쓴 다음 아무렇지 않은 척 있던 자리에 그대로 올려 두었다. 내 행동이 웃겼다. 그리고 이상하게 허했다. 나만의 친밀감이 속에서 응어리지기만 해서 그런 걸까. 모히토 한 잔을 더 시켰다. 물밀듯 밀려온 공허함은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감상 시간이 끝나고 나는 술을 더 마시고 싶었다. 근처에 보이는 바에 들어갔다. 바 자리에는 두 분의 손님이 각각 앉아 있었고, 나도 멀찍이 바 자리 한편에 앉았다. 들어가자마자 전문적인 포스를 느꼈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바텐더는 벽면에 꽉 찬 모든 술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앉아 있던 손님들과 두런두런 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블랙 러시안을 시켰다. 바텐더는 보드카에 커피 리큐어를 섞은 뒤 커피콩을 태워 장식해 주었다. 나의 ‘이건 커피콩 태운 건가요?’라는 물음에 돌아오는 ‘네, 후각으로도 맛보시라고요’라는 대답. 멋있었다. 자리가 바 자리여서도 그렇지만 내가 봤던 바텐더 중 이렇게 예술적으로 술을 만드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서 자꾸만 보고 있게 됐다. 바텐더는 정말 멋있는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또 한 번 공허했다. 바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이방인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차라리 친구랑 왔다면 분위기 정말 좋다며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다른 손님들 전부 다 홀로인데 왜 나만 이렇게 외로워하고 있는 것 같지. 마음에 드는 분위기 때문에 첫 번째 술을 시키자마자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해 두었다가 이내 취소했다. 피드에 이 바가 뜨면 공허했던 마음이 자꾸만 떠오를 것 같았다.



  알코올 네 잔에 취할 법도 한데 취하지도 않았다. 취했으면 덜 외로웠으려나. 외롭구나. 나 외롭네.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리고 안도했다. 이렇게 외로움을 가득 느낄 때가 마침 육지로 돌아갈 때라서. 덜 아쉬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기다려 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아쉽지 않은 마지막 금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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