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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윤 Feb 27. 2022

근황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전전긍긍하며 시간을 쏟다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무력함이 꼭 무능력함 같아서 패턴을 무너뜨리면서라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밤까지 풀리지 않던 일들도 아침이 되면 어찌저찌 풀리곤 했지만 주 단위로 보았을 때 확실히 들인 시간 대비 역량이 부족했다. 내가 맡은 바를 잘 완수하고 싶은 욕심은 차고 넘치지만 내 기술적 역량을 높이고 싶은 욕심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나 개발 못하는 것 같고, 지금 앞에 닥친 문제 잘 해결하려면 개발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역량 증진을 위한 공부에 시간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취미가 일이 되게 하고 싶은데 개발은 언제나 내 취미는 아니었기 때문일까. 나는 왜 항상 적당한 것을 더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언제쯤 자신 있는 사람이 될까. 학습된 겸손은 왜 자신감 결여로 이어졌을까.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감정이 잊혔다. 한 달 전 예약한 첫 타투를 받으러 부산에 왔다. 타투이스트는 내게 이번이 첫 타투냐고, 본인은 첫 타투를 받기 전 소풍 가는 마음이었다고, 설레서 잠 못 들었다고, 떨리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설렌다 대답했지만 사실 그렇게 오래도록 고민하고 고대한 날이었음에도 소풍 같은 설렘이 들지는 않았다. 덤덤한 마음 무색하게 결과물은 시리도록 예뻤다. 강아지를 처음 데려오던 날처럼 한평생 데리고 갈 녀석이 내 품에 있는데도 얼떨떨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과 모양을 팔 안쪽에 새기고 발걸음 닿는 대로 두었다. 카페에 앉아 유정을 기다리며 <불안의 서>를 읽었고, 밑줄을 그었다.


내가 쓰는 글, 나는 그것이 형편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읽은 한두 명의 상처 입은 슬픈 영혼은, 한순간이나마 더욱 형편없는 다른 일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내가 만족하는가 만족하지 않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내 글은 어떤 방식으로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생 전체가 그러하듯이. 권태는 앞으로 도래할 더욱 커다란 권태의 전초적 감정일 뿐이다. 내일 닥쳐올 고민을 오늘 앞당겨서 미리 고민하는 것이다. 그건 혼돈의 소동에 불과하다. …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이, 그냥 혼돈일 뿐이다. … 지금 이 순간 느끼는 회의는 나를 짓누르지 않으며, 내 안에서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시간의 확장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 나는 무조건 나이고 싶다.


나는 무조건 나이고 싶다. 나는 무조건 나이고 싶다. 문장을 두어 번 곱씹을 때쯤 유정이 도착했고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며 오랜만이라 인사했다. 근 일 년 만이었다. 유정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정은 나와 반대인 점이 많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나 최근에 누군가에게 혼나는 걸 극도로 무서워하는 게 엄마한테 혼나면서 컸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 너는 혼나면서 컸어? 하고 물으면 나는 혼나기보다는 싸웠지, 했고 유정은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벼락치기 일화와 잘 안 되면 확 포기해 버린다는 이야기를, 나는 책임감이 나를 집어삼켜 안 되는 것도 적당히까지는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컵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걸 보면 꼭 위태로운 마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이곤 했는데 요즈음은 그냥 컵이군, 한다는 것, 그 이야기에는 나도 공감하며 크게 느껴지는 게 없다 했고,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게 불안하냐 물었고, 유정은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했다. 나도 딱 그 정도였다. 전과 달라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안 느껴지는 시기도 있는 거지, 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상태.


새벽 다섯 시까지 유정의 방에서 재잘거렸고 중간중간 공백도 있었다. 유정은 내가 잠들 것 같으면 이런저런 말을 걸고 내 몸을 괜히 짓눌렀다. 나는 침대 헤드를 주먹으로 쿵쿵쿵, 치고 니 안 자서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옴, 걔는 내가 망태 할아버지보다 더 세, 했다. 망태기 따위를 들고 다니는 할아버지보다 유정의 기가 확실히 더 셀 것 같긴 했다. 나는 엄마가 망태 할아버지만 불러 오면 무서워서 눈 꾹 감고 잤다고 했고 걔는 자기보다 엄마가 먼저 잠들면 토닥이던 손등 콕콕 치면서 엄마, 나 아직 안 자는데? 했다 그랬다. 어린 날의 나와 유정이 겹쳐 보이며 우리의 현재가 과거와 많이 닮아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잡혀 갈까 두려워 두 눈 질끈 감던 어린 아이는 여전히 책임감에 짓눌린 채로 적당하게만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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