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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니 Oct 21. 2023

버킷리스트 1번, 산티아고 순례길


우리 모두 버킷리스트 하나쯤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잖아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2021년 여름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집 근처 (유일한) 한인도서관에서 에세이 코너 앞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또, 여느 때와 같이 흥얼거리며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고. 그러다 내 눈을 사로잡은 흥미로운 제목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다시 또,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길이 뭐길래 다시 또 가고 싶단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그 옆에도 '산티아고'라는 글자가 여럿 보였다. 일단 내 흥미를 가장 먼저 돋운 책을 집어 자세히 살펴 보니 부제로 '산티아고에 두 번 이상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문구가 있었다. '두 번도 아니고 두 번 이상이라니... 도대체 뭐길래...' 이유 모를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오늘의 책을 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


...망했다. 단숨에 읽어버렸잖아.



"큰일 났네. 너무 걷고 싶어."






원래 나이대로라면 갓 스무살이 된 성인이기에, 친구들과 한창 만 나이 제도로 툴툴거리던 때가 있었다. 앞자리가 지겹도록 1로만 살아왔던 십대에서 드디어 2로 넘어가나, 나 이제 멋진 대학생 언니야가 되나 싶었는데 아직도 십대라니. 진지하게 시뮬레이션까지 돌리며 토론도 했었다. 나이를 물어보면 '20살이라 할 것인가, 19살이라 할 것인가', '언제부터 19살이라 할 것인가.' 맺음말은 언제나 '근데 도대체 왜 우리 때 만 나이 제도로 바뀐 거야. 억울해.'


나도 처음에는 입을 삐쭉거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 때' 만 나이 제도가 도입된 것에 감사하다. 만 나이 덕에 수혜를 본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2021년 그날, '그' 책을 읽고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그날 바로 순례길이 내 운명임을 직감했으나, 당시 나는 현실도피가 시급했던 고등학교 1학년이었기에 당장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게 일었던 것도 같다. 며칠 동안 순례길만 생각하며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었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시작했다.



"자, 나는 중국에 사는 고등학생이야."



바로 이 첫 문장에 백기를 들게 된다. 2021년은 코로나가 처음으로 발발한 해였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에 제약이 있었던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겠지만, 이를 계기로 가슴 속에 순례길이라는 버킷리스트를 새기게 되었다.



"자, 다시. 그럼 대학생 때 가자..."

근데 나 10대 때 걸어보고 싶은데...



만 나이 제도에 이렇게나 감사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덕분에 그로부터 2년이 흘러 지난 7월, 내가 원하던 십대의 신분으로, 열아홉에 순례길을 걷게 되었다.





까미노, 시작합니다


까미노(Camino)는 스페인어로 길을 의미한다. 스페인에는 여러 갈래의 까미노가 있으나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최종 목적지로 향한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을 '순례자(Pilgrim)'라고 하는데, 생소한 단어인지라 편의상 필그림으로 통일하도록 하겠다.


최종 목적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필그림들이 서로 유대감과 내적 친밀감을 갖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순례길에 오른 이상, 누가 뭐라해도 우리의 신분은 '필그림'이다. 필그림들은 산티아고를 향하여 어제를 걸었고, 오늘을 걸었으며, 내일을 걷게 된다. 단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Buen Camino!(좋은 길 되세요)'라는 인사말로 시작해 서로의 걸음을 응원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정함이었고 따뜻함이었다.


여기서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왜 걷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내가 만난 필그림들에게 물었을 때, 거의 비슷한 대답이 오가는 걸 보니 이유를 모르겠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듯 싶다. 이제, 한때 필그림이었던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왜 걸었던 것 같아?"


"나를 알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


    


   


첫 날,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눈을 뜬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을 걸었을까, 생장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독일에서 온 필그림, Christophe를 만났다. 참 신기하고도 오묘했던 것이, 까미노 첫 날에 만난 첫 필그림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의 주인공(순례자)의 이름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는 어린 나이에 순례길에 오르게 된 이유를 궁금해했다.


"응, 2년 전에 우연히 책을 읽고 막연히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오게 됐어.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게 꿈만 같아."


크리스토프는 이번 까미노가 처음이 아니랬다. 몇 년 전에도 같은 길을 걸었다며, “한국에서 요즘 순례길이 유행이라면서?"부터 시작해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파리에서 신나게 여행을 하다 감기몸살에 걸렸다고 하니 몸을 잘 챙겨야 한다며 과분할 정도로 걱정도 해주었다. 코를 풀려고 손을 뒤로 뻗어 배낭을 뒤적거리자, 크리스토프가 말없이 배낭 주머니에 꽂힌 휴지를 건네주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를 대화하며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걸음이 빠른 크리스토프에 비해 내가 점점 뒤처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래도 크리스토프와 나란히 걷는 건 더 이상 무리일 것 같았다.

    

"미안해. 내 걸음이 너무 느리지? 먼저 가도 돼."

    

크리스토프는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It was a nice walk with you. See you, and Buen Camino!"


"응, 나도 즐거웠어. 부엔 까미노!"




Day 1 - 생장, 그리고 피레네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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